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사물을 가까이 보여주며 시작된다. 기하학적인 무늬의 그것은, 어떤 이의 공간을 구분 짓는 담벼락일 것이라 생각했다. 서서히 카메라가 응시하던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사물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세상을 바라보고 점점 하늘로 올라가던 카메라의 시선은 거리를 헤매다 한 남자의 뒷모습을 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눈은 캐롤과 테레즈, 두 사람에게 머문다.
영화가 시작된 그 시점에 우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데이트 중이었는지, 아니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는지 추측만 할 뿐이다. 젖은 창문에 가까이 기대어 거리를 바라보던 테레즈의 회상에서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쫓아가, 영화 말미에 이르러 캐롤이 테레즈에게 막 사랑한다 고백하던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눈빛으로 나를 사냥하는 것 같던 캐롤의 모습을 테레즈가 먼저 쳐다본 것은 너무도 이해 가능하다. 모두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가 단연 돋보였던 것은 사실이니까. 호기심에 잠시 그녀에게 눈을 두었을 때 캐롤이 테레즈를 쳐다 본 그 짧은 순간, 그때부터 두 사람은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화려한 시각적인 효과가 아니라 두 사람의 눈빛만으로도 그 순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고양이들이 서로를 탐색하듯 캐롤과 테레즈는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눈다. 캐롤의 낮은 목소리와 성숙함이 줄줄 흐르는 분위기는 테레즈의 때 묻지 않은 모습과 서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 다름은 부딪혀 튕겨나가지 않고 작은 긴장감을 깔아주며, 서서히 케미를 형성한다. 테레즈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테레즈를 보는 캐롤의 눈빛이 어떠했는가. 마찬가지로 캐롤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테레즈 역시 캐롤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은 카페에서 만나 두 번째 탐색을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두 사람의 시선에서 상대방을 보여주지 않고, 우리가 두 사람을 관찰하는 것처럼 일부러 거리를 두고 보여준다. 캐롤의 모습은 화면의 왼편에 치우쳐 있고, 오른쪽엔 테레즈의 머리가 있다. 가끔 캐롤이 움직이면 표정이 가려지기도 한다. 옆 테이블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캐롤과 테레즈를 구경하는 우리에게 두 사람의 감정은 전부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서로에게 호감은 갖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묘하게 웃으며 서로를 보는 그 눈빛은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카메라의 시선과 캐릭터의 눈빛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영화 자체가 그런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오는 날, 캐롤과 테레즈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그 장면도 그랬다.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웠던 테레즈는 그날 결정적으로 사랑을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카페에서와는 다르게 카메라는 캐롤의 얼굴, 손, 어깨 등을 클로즈업했다. 지금 테레즈가 보고 있는 캐롤의 모습이다. 차 안에서 함께 눈을 맞으며 터널을 지나고, 터널을 빠져나오며 화면이 화이트아웃 될 때 알 수 있었다. 테레즈가 기억하는 ‘캐롤을 향한 사랑의 순간’은 아마 이 장면일 것이라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서로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듯, 테레즈에게 캐롤은 태어나 처음으로 접해본 큰 세상이었을 것이다. 근사하지만 지난한 삶을 보내는 캐롤은 테레즈의 세계 속에서 평안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잠시 헤어져야 했다. 테레즈는 잠시 캐롤에게서 떠나 두 사람의 사랑을 곱씹어봤을 것이다. 원래 사랑이든 일이든, 그 끝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가던 그 사랑을 계속해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 테레즈에게 이별의 편지를 남겼을 때도 느꼈지만, 이혼 심리 중에 보여줬던 캐롤의 행동은 무척 어른스러웠다. (어른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릇이 크고 넓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우리는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첫 장면에서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보이던 그 순간, 캐롤은 테레즈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다. 테레즈의 감정을 따라가던 나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테레즈는 어땠을까. 다른 이에겐 스치는 풍경일지라도 두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느낀다. 고백에 뒤이은 캐롤의 제안은 더 놀라웠다. 여행을 함께 가주면 좋겠다고 했던 그때처럼 캐롤은 테레즈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테레즈가 눈빛으로 그 손을 잡아주었을 때, 마지막으로 테레즈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표정이 얼마나 따스했으며 섹시했는지는 영화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캐롤, 정말 정말 근사하다.
# 언급했듯 카메라의 시선과 배우들의 눈빛이 가장 인상적인 영화다. 이를 가능하게 한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캐롤의 손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그녀의 손은 참 많은 일을 한다. 처음 만난 날 사인을 하고, 그 이후엔 운전을 하고 테레즈의 어깨를 만진다. 그녀가 사랑의 감각을 숨기지 않을 때 손톱은 붉은색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각을 숨기고 살기로 합의했을 때 그녀의 손톱엔 색이 없다. 옷의 색깔도 무채색에 가깝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다시 사랑의 감각을 키울 때, 그녀는 이전보다는 덜 화려한 색의 옷을 입었지만 손톱엔 다시 그 붉은색을 입혔다. 숨기지 않을 것이며, 숨지도 않겠다는 뜻 같았다.
# 아름답고 황홀한 사랑의 순간이 계속 처연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음악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랑을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그런 감정이 들 때가 있으니까. 사운드트랙은 국내 발매가 안 된 것 같아서 아이튠즈 해외계정으로 구매했다. 지난 번 <셀마> 사운드트랙 받는다고 한 번 만들어 놓았더니, 국내에서 발매 안 되는 사운드트랙 구매할 때 아주 편리하다. 역시 덕질은 부지런히 해야 좋다.
201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