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착잡함 속에서 살고 있어. 미소를 잃어가면서.
소설 <메이데이 메이데이> 브런치 ver.
<메이데이 메이데이>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 출판 콘텐츠'로 당선되었던 소설입니다.
※ 메이데이 메이데이(MAYDAY MAYDAY)는 비행기가 문제가 생겨 추락할 때 사용되는 국제 조난 신호로, ‘나를 도우러 와줘’라는 프랑스 말 Venez m’aide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숨을 너무 많이 쉬는 증상에 죽지는 않는다는 얘길 너에게 들었어. 헉헉 숨이 가빠도 죽지는 않는다는 얘길 너에게 들었어. 죽을 것만 같은데 죽지는 않는다는 얘긴 너무 무서웠어.
너의 덤덤한 표정 역시 무서웠어.
힘내라는 말에 왠지 기운이 빠지는 때가 있지. 신경 쓰지 말란 말에 한층 신경이 쓰일 때가 있지. 힘내라는 말 난 못해 나도 숨이 적은 편은 아냐. 내가 마지막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거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
▐ 가을 방학의 <호흡 과다> 중에서
나는 지금 화장실 안에 있다. 호흡이 진정이 안 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또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또 나를 덮쳤다.
이제 몇 분 후면 강의가 시작이 되는데, 이제 곧 강단 위에 서서 강연을 해야 하는데, 공황 증상이 진정되지 않는다. 결국 진정시키고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어서 나올 것도 없는데 나는 내 불안함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내 안에서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헛구역질을 하며 토해냈다.
빈 속에 헛구역질을 하면서 토하고 나면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해진다. 정상적인 것, 당연한 것이 안 되는 지금 나의 모습에 너무도 착잡해진다.
세면대에 붙어있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이라는 것에 나 자신이 무슨 이중인격자나 사이코패스 같이 느껴졌다. 매번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 대학원 생활을 유지해야 할까?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내가 공황 증상에 잘 빠지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교수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전공 수업보다는 그 이유를 찾는 데에 더 집중했었다. 저주와 같은 이 반응에 왜 갇히게 된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너무도 알고 싶었다. 너무도 힘들고 속상했었으니깐 말이다. 그런 내가 너무 불쌍하고 서글펐다.
원래부터 공황 증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버스에서 전철로, 전철에서 택시로, 택시에서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에서 강의실로, 강의실에서 식당 등으로, 밀폐된 느낌을 주는 모든 곳에서 공황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든 곳이 나에게는 긴장과 타거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불안을 겪게 되면서 내 생활에는 너무 많은 제약들이 따랐다.
나의 긴장과 불안은 공간에서 사람에게로까지 전염되어 갔다. 마치 어떤 마녀가 내가 자고 있을 때 와서 나에게 세상에 대해 긴장과 불안을 갖게 되는 저주를 심어놓고 간 것만 같았다. 왜 나에게 이런 저주를 걸고 갔나요?
화장실을 나와서 강의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강의실 쪽을 향해 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하고 쳤다. 나는 마치 화장실 안에 뭔가 숨기고 나오다 걸린 사람인양 깜작 놀랐다. 뒤에서 내 어깨를 톡 하고 친 사람도 같이 놀라 소리를 쳤다. 혜아였다.
“선배, 저예요. 혜아.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전 선배 보고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런데 괜찮아요?"
나는 혜아가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특별하지 않고 흔한 말인데 그 순간 내 안에 깊이 들어왔다. 괜찮냐는 말이 그렇게까지 깊게 맴돌았던 것은 너무도 괜찮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하나도 괜찮은 것이 없던 나였기에 그렇게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말에 나의 속상함과 서러움을 꺼내버릴 뻔했다.
"응, 괜찮아. 너도 권 교수님 수업 듣지? 같이 가자구나."
나의 공황 증상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점점 더 착잡해져 갔다는 것이다. 변기를 부여잡고 토하는 모습에 참담함에 빠지지 않고 괜찮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 참담함의 한 복판 안에 혼자 있던 중이었다. 그런 나에게 나에 대해 살펴주고 물어봐주는 혜아가 너무 고맙고 소중했다.
'왜 나는 이런 것을 겪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려고 하다가도 당장 내 생활을 유지 해나가게 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 더 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강 선배가 연락하고 강 선배의 병원에 갔다. 강 선배는 내가 공황 장애로 인해 겪어야 하는 초라하고 한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정신과 약을 편하게 처방해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전날 일이 중간중간 기억 안 나. 특히 집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기억이 아예 없어. 기억이 없다는 것이 무서워. 술 먹고도 필름이 끊겨 본 적이 없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 뇌가 망가져가고 있는 것만 같아 겁이나.”
“너 약을 얼마나 먹었던 거니? 혹시 술이랑 같이 먹었니?”
“술도 술이지만, 하나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세 개까지 먹었어.”
“증상이 너무 심하지 않으면 두 알 정도까지만 먹지, 너무 세게 먹곤 하면 안 좋아. 약과 술을 같이 먹으면 그 효과가 배가 되어서 더 안 좋다는 거 너도 잘 알잖니?”
“머리로는 알지. 왜 모르겠어?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맡은 일들이 있고, 난 그걸 해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다른 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민준아...”
"그럼 어떡해? 예전과 다르게 몸이 반응해버리는데. 어쩔 수 없이 더 세게 먹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착잡하니깐 술을 마시게 되는 거고. 선배, 선배는 이런 증상 겪어본 적 없지? 없으니깐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거야. 막상 증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리고 모든 것이 비참해져. 그냥 그런 이야기 말고 저번처럼 처방전 하나 써줘.”
강 선배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래”라고 말하고는 앞에 있는 마우스를 잡고는 이것저것 클릭하면서 처방전을 만들어주었다.
“너도 잘 알지? 제일 피곤한 환자가 너 같은 환자라는 거.”
“알지. 고마워.”
“퍽이나 고마우려고, 고마운 사람이 이러니?”
“미안해 선배, 내가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래.”
“그래,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언제 병원 말고 밖에서 좀 보자꾸나. 나도 예전처럼 너랑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 나도 요즘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하거든. 나도 좀 상담받고 싶어.”
“그럼 선배가 나에게 메이데이를 치던지.”
“지금 나 너에게 메이데이 친 건데?”
우리는 종종 연락하라는 말 대신 메이데이 치라는 말을 썼다. 우리라기보다는 강 선배가 종종 썼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이 유치한 표현을 같이 쓰고 있었다. 마치 메이데이라는 말은 강 선배에게 있어서 자신과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주는 그만의 표현인 것 같았다. 강 선배는 가까운 사람에게 쓰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나는 친밀감의 표현에 대한 친밀감의 반응으로 이 표현을 쓰곤 했다.
“아, 맞다. 민준아, 너 직접 만나서 주겠다고 했던 게 언제 받아볼 수 있는 거니? 벌써 얼마나 지냈는지 아니?”
“응?”
“네가 준비해왔던 책 말이야. 섬세한 사람에 관한 책을 드디어 출간하게 되었다며 엄청 자랑했던 거.”
“자랑은 무슨, 다음에 꼭 갖다 줄게. 민망해서 그래.”
강 선배는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강 선배를 좋아한다. 하지만 종종 강 선배가 보여주는 분석하고 평가하는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이 불편함은 어머니에게 받아야 했던 지적들에 질리고 지쳤었던 기억이 반응하는 불편함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 나오게 되는 불편함의 반응이든, 선배에게 느껴지는 불편함으로 인해 책을 주는 것이 머뭇거려진다. 무언가 평가받게 될 것 같은 것에 신경 쓰이고 의식하게 되니 말이다. 선배에 대해 이런 반응을 갖게 되는 것이 난 너무 착잡했다. 어쩌면 그 착잡함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제일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람이라는 착잡함 말이다. 그런 사실을 접하게 된다면 너무 슬프고 외로울 것 같았다. 이해받고 편안함을 가질 수 있게 서툴더라도 사려 깊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별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라는 말보다,
나랑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백배, 천배 위로가 된다.
▐ <또 오해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