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갈 곳이 없었던 나를 위한 공간

소설 <메이데이 메이데이> 브런치 ver.

by 연남동 심리카페

<메이데이 메이데이>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 출판 콘텐츠'로 당선되었던 소설입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MAYDAY MAYDAY)는 비행기가 문제가 생겨 추락할 때 사용되는 국제 조난 신호로, ‘나를 도우러 와줘’라는 프랑스 말 Venez m’aide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몇 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에서.


S대학원 섬세한 성격 스터디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강의실.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민준이 강단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에 소중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무섭다고요.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폐허로 만들어버리곤 한다고요. "


민준이 하는 말을 혜아가 들으며 자신이 그 소중한 친구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무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있지만, 사실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자기에 대한 언급이 나와 긴장되었다.


"사람들이 퍼트리는 소문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내뱉는 분석, 그리고 날 향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방적인 요구와 기대 속에서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나에 대한 이야기,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안에 나는 빠져 있다는 것이, 내 기분과 감정, 상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일 거란 생각은 참 외롭고 회의적이게 만들죠."


민준은 강의실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한다.


나를 폐허로 만드는 사람들과 무턱대고 좋게 잘 지내려고 하는 것은 섬세한 사람들에게 더 갈 곳이 없게 만듭니다. 분별을 하지 않은 이해는 결국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잘 어울리고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상황을 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시작된 노력은 지침과 회의감, 이해받을 수 없다는 인식만 더 깊게 심어놓습니다. 외롭게 만드는 거죠. 더 갈 곳이 없는. 그래서 전 오늘 분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민준은 말없이 칠판에 희한한 용어 일곱 개를 나란히 적고서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현존하는 인류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렇게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일 계보의 진화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 최소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솔로엔시스, 호모 데시소바, 호모 루도펜시스, 호모 사피엔스라는 여섯 종이 함께 존재했었고, 그중에서 호모 사피엔스들이 살아남은 것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저는 이 가설이 더 와닿습니다."


팀원들은 민준이 나눠준 프린트물에 민준이 해주는 이야기를 필기하며 듣고 있다.


"사피엔스들이 갖고 있는 이기적인 잔인성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힘이 부족한 존재들을 지배하거나 피폐하게 만들어서 멸종시켜버리는 잔혹한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멈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멈추게 하는 일과 그들로 인해 다치고 피폐해지는 사람들을 위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로 인해 다치고 피폐해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게 막는 일이고, 그것은 분별을 통해 가능합니다. 무턱대고 좋게 잘 지내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먹잇감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먹잇감이 되는 것의 끝은 피폐함입니다."


한 여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한다.


“피하는 것보다 그들을 멈추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그들은 그렇게 움직이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막을 수 없다고 단정 짓을 수 있죠? 너무 부정적인 것 아닌가요?"
"만약에 당신이 그들이 호소하는 안타까운 사연, 안쓰러워 보이는 표정, 미련을 갖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갖잖아요. 그럼 그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준 동정과 연민을 이용합니다. 애당초 목적성을 갖고 의도적으로 하는 호소이고 연출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수도 없이 증명해왔습니다. 그들이 타고난 습성을 감상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그들과 공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당신이 제2의 은석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한다면 그런 무책임한 감상을 갖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을 더 잃어가면 안 됩니다."


민준은 손을 들었던 여학생을 보며 말을 했다.


"진심으로 제2의 은석이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무책임한 감상론과 희망론은 접길 바랍니다. 노력과 진심은 파도가 밀려들어오는 곳에 지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당신의 노력과 진심, 호소와 부탁과 상관없이 파도는 와서 당신의 모래성을 폐허로 만들죠. 당신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이해가 막연한 당신의 노력과 진심보다 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혜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민준에게 질문을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저도 계속 생각 중입니다. 은석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첫 번째 화두로 주제를 잡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은석이가 겪어야 했던 상황과 환경을 더 겪지 않게 해 줄 수 있을지, 은석이와 같은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할 수 있는 분별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민준은 스터디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한번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섬세한 성격에 관한 스터디 모임 모집 공고를 보고 모인 분들이시죠. 그래서 전공들도 다채롭습니다.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야기해주세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스터디 모임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면서 민준은 다른 사람들과는 헤어지고 혜아와 유진이와 함께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내려가고 있다. 혜아가 민준을 보며 말을 건다.


“선배도 치료사가 될 거예요?”
“아니, 난 치료에는 관심 없어. 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쉽게 치료가 된다거나 해결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거든, 치료적인 접근들도 필요하지만 난 치료 말고 환경에 관심이 있어.”
“환경요?”
“응,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생활해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덮어.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도. 그래서 자기가 지금 얼마나 상처받았고 방치되었는지를 잘 몰라. 그리고 지금 자기가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도 정확히 잘 모르고."
“자기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 지를 잘 모르고 잘 웃는 모습도 비슷한 건가요?”
“응,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 중 하나지. 아프고 힘든 거 잘 모르고, 그냥 웃음으로 넘기려고 하는 거. 불편감만 벗어나는 데에 급급한 거야. 자신이 어떤지를 말로 표현을 못해. 정말 몰라서.”


혜아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선배, 그림을 활용하는 거 어때요? 그림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거든요. 그림검사를 좀 더 진화시키면 선배가 원하는 분별력을 높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혜아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학부 전공도 미대를 나와서 더 말에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혜아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는 무언가 진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흥분해서 말을 했다.


“선배, 선배, 카페에서 그림 검사해주면서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거 어때요? 카페니깐 치료센터나 병원보다는 덜 부담스럽게 찾아올 수 있을 거고요, 분별해내야 하는 상대들도 치료센터나 병원보다 덜 경계하면서 오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더욱이 데이트로 사람들이 잘 가는 곳이면 덜 경계할 거 같은데요. 예를 들면, 연남동 같은 곳이요.”
“그림검사, 카페, 연남동...”
“전에 선배가 섬세한 성격에 관한 연구회 때 해준 Squiggle(난화) 정말 흥미롭게 신기했었거든요. 왠지 선배는 치료센터보다는 카페가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와 진짜 그런 공간에서 선배가 그런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공간... 그런 공간 정말 만들 수 있을까?”
“선배는 그런 공간, 민들 것 같은데요. 뉴스나 인터넷을 보면, 비인간적이고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은석이가 겪고 보내야 했던 환경이 그랬었고요. 선배 같은 사람이 그런 공간을 만들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아까 선배가 이야기해줬던 것처럼 인류는 사피엔스가 대다수이지만, 사피엔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큰 위안과 위로를 얻게 될 거예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갈 곳이 있게 되는 것이니까요 얼마나 특별해요?”
“그런 공간,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있어도 체크리스트 검사지를 사용하는 곳이 대부분일 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난 선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여서 언젠가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넘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무 지치고 질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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