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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만에 다시 오르는 지리산

by 호모워커스

사건의 시작은 얼마 전 페북에서 본 의득의 지리산행 포스트였다. 코로나 이후로는 지리산을 가지 못해서 언제 한번 가리라 맘만 먹고 있던 나에게 친구의 지리산 여행 글은 내 마음을 파헤쳐 놓았다.


귀농해서 곡성에 자리 잡은 의득은 내가 썼던 경기둘레길 포스트 댓글에서 곡성에 들르게 되면 언제든지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난 이 말을 듣자마자 파헤쳐진 내 마음속에 사건의 씨앗을 하나 묻어두었다.


경기둘레길 완주한 글을 읽고 친구 태현이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축하한다는 말과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함께 어디든 가자고 했다. 내 맘 속 씨앗이 한 뼘 더 커졌음을 감지했다. 지리산이 한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작년에 동관 형님, 친구 필성과 함께 지리산 등반을 계획했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결국 미완으로 남아있었는데 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해결책이 생긴 것이다.


태현은 27년 만의 지리산이란다. 30년 전에 우리는 우연하게 지리산에서 만났고, 고교 동창이라는 인연을 넘어 지리산 동지이자 시대적 동지로 발전한 걸 확인했었다. 그 뒤 아이들과 함께 가족 여행도 함께 갔었던 그 태현인데,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또한 이리저리 망가진 몸에 자신이 없었던지라, 이번이 27년 만에 다시 가보는 지리산이라고 했다.


동관 형님은 35년 만의 지리산이라고 했다. 80년대 이후로 치열하게 노동 현장과 혁명의 전선을 지켰던 그에게 35년 전의 지리산은 트레킹과 여행이 아닌 지옥 훈련과 극기의 상징이었던 게다. 동관 형님은 예전의 지리산을 그리워했고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가장 청년인 지금, 35년 만에 다시 지리산을 오르고 싶어 했다.


필성은 지리산과 결혼한 청년이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지리산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한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지리산 가는 길을 내가 알려주었던 게다. 그러니 그는 항상 나의 지리산 길동무였고 나는 그의 지리산 동지였다. 그런 그가 이번 산행에서는 마지막 날 변심하여 마음만 보냈다. (코펠이 3인용이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긴 하다 ㅋ)

지리산의 베이스캠프가 된 곡성의 의득은 나에게는 복이다. 세월호 집회에서 아주 오랜만에 만나 우리 집에서 술 한 잔 나누며 하룻밤을 보낸 것도 복이요, 곡성에 귀농한 것도 나에겐 큰 복이다. 누구나 다 아는 그 유명한 출판사를 떠나 곡성으로 귀농하게 된 그의 개인사는 이번 베이스캠프 술자리에서는 미처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소재가 워낙 다양해서 끼어들 틈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곡성에 모인 세 명은 서로를 잘 모르는 관계다. 모두 나를 통해 모이게 된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우리는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7시간 동안 수다, 혹은 정담을 나눴는데 그 과정이 불가사의하다.


동관 형님이 첨도에서 가지고 온 이름 모를 10년짜리 담금주와 낙지, 문어숙회의 힘이었는지, 혹은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에 찌들었던 중년 노인들이 오랜만에 수다의 회포를 푼 것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의 낡고 희미해진 기억을 소환하여 재구성하는데 이 시간을 다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나, 동관, 태현은 친구 의득 집에서 하룻밤을 잤고, 의득의 부인님이 만들어주신 된장찌개와 북어 해장국을 맛있게 먹었으며, ebs 건축탐구 집에나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주인을 닮은 전원주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지리산 백무동으로 떠나게 된다. 물론 필성의 마음도 챙겨서.


그리고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대피소(1박) - 촛대봉 일출 -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 - 백무동 하산길로 이어지는 20여 km, 1박 2일의 산행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걷는 내내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행복했다. 새벽 5시 30분에 불타오르는 촛대봉 일출에 황홀했고, 그 첫새벽에 지리산 능선에서 보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의 아스라한 실루엣과 그 곡선을 살짝 가린 운무의 아름다움에 탄복했다.

또는 27년 전 혹은 35년 전의 흐릿한 기억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풍광을 보며 세월의 야속함도 느꼈을 거고, 세월과 함께 소멸해 버린 청년 시대 체력이 아쉬웠을 것이다.

29명의 단체 등산객의 시끄러운 수다와 천왕봉에서 명당자리를 독점하며 추억을 찍는데 여념이 없는 그들의 행태에 분개하기도 했고, 이와는 반대로 그들에게 도사님 소리를 들으며 팬을 만들기도 했다.

백무동 식당에서 찬물로 샤워한 후 테이블에 앉은 우리는 산채비빔밥과 도토리 묵을 먹으면서 뒤풀이를 했다.


“무사히 산행을 마쳐서 다행입니다. 산행을 축하드립니다.”

“아직은 체력이 된다고 생각해서 올라가긴 했는데 종주하라면 은근히 부담이 되네.”

“준비 많이 해서 나중에 꼭 종주를 하고 싶어요.”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리산도 많이 변했고 그때의 철 모르던 대학생과 패기 어린 혁명가도 많이 변했다. 합해서 63년의 공백(^^)을 딛고 서로를 알아보기에 1박 2일은 너무 짧았을 것이다.


다시 가겠다면 언제든지 콜이다.

마음만 따라왔던 필성도 담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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