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어른이 되는 1단계 : 뽈뽀

by 지이옴

뽈뽀라는 음식이 있다. 뽈뽀(pulpo)는 사실 스페인어로 '문어'인데, 흔히 음식 뽈뽀를 말할 때는 스페인식 문어 요리를 일컫는다. 여러 요리 방식이 있겠지만 일단 올리브유는 당연히 쓰는 듯하고, 감자가 들어가는 것 같다.


대학교 친구 D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기념으로 Y와 함께 셋이 만났다가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끊었다. 연수에 들어가기 전까지 뭘 해야 하냐, 라는 질문에 먼저 직장 생활 중인 나와 Y는 이구동성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돈이 없겠지만 나중엔 시간이 없다며,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뚫어서 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다가 뭐, 같이 가게 되어버린 거다. 그 자리에서 헬싱키를 경유 바르셀로나 왕복 핀에어 항공권을 끊었다. 아직 마이너스 통장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던 D의 항공권은 일단 Y가 먼저 끊어 줬던 것 같다. 낭만적인 스타벅스였다.


요즘 찾아보니 핀에어가 기내식이 참 별로라는데, 그런 기억은 없다. 그저 친구들이랑 가는 유럽행에 설레기만 했고, 아주 잠깐 경유했던 헬싱키 공항 구경마저 재미있었다.


그 여행에서 뽈뽀라는 음식을 알았다. 요즘은 한국에도 많기야 하지만, 그때라고 없지야 않았겠지만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음식이었다. 우리가 부산에 살아 그랬을까. 서울에 살았다면 메뉴판에서 한 번쯤 봤으려나.



경상북도인 우리 할머니집 제삿상엔 간장에 조린 문어 꼬치가 늘 올라오는데, 어릴 땐 그 짭조름함을 그렇게도 좋아하다가 크면서는 질긴 게 싫어 같은 간장에 조린 소고기꼬치를 더 좋아하게 됐다. 그 이후로는 아주 얇게 저민 문어숙회 정도가 아니고서야 문어에 딱히 호감이었던 적이 없는데, 바르셀로나 항구에 있는 큰 식당에서 처음 맛본 뽈뽀는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지중해 해산물이 유명하댔지?문어가 이렇게나 부드러울 수 있나? 보기에는 딱히 화려하지도 않았다. 문어, 감자, 올리브유, 파프리카 가루 정도가 눈에 띄었다.


뽈뽀 이외에도 바르셀로나에 있는 동안 친구들과 처음 맛본 것들이 많았다. 타파스를 먹으며 이렇게 작고 먹기 좋게 나온 맛있는 안주가 있다는 것도, 서서 먹는 술집이 있다는 것도 알고, 꿀대구를 먹으며 탕으로나 먹어 본 대구라는 생선이 이렇게 토마토소스와 어울린다는 걸 알고, 하몽이 비리지도 않고 이렇게나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정육점과 마트에서 하몽과 과일, 사워소스 대신 요거트를 사서 한국에서 먹어본 하몽 메뉴를 흉내내어 보기도 했는데, D는 이렇게는 처음 먹어 본다며 놀라워했고, 이후 바르셀로나 여행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몽 이야길 하곤 했다.


나도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처럼 멋진 어른이 된 거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불편했을 거 같기도 하고, 아마 선생님도 실수였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 시절 나는 선생님의 페이스북 계정을 친구 추가했고, 선생님의 요리도, 여행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아, 선생님의 SNS에 침투한 것에 대한 조금의 방어를 해 보자면 그게 고등학생 때는 아니고, 졸업 후 대학생이 되어 더 이상 고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을 때였다. 처음 보는 멋진 음식들도, 예쁘게 입고 먼 나라에서 찍은 멋진 사진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선생님이 나를 차단하지는 않던 것 같다.


선생님의 사진들엔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 어른이 되면 저런 음식들을 알게 되는 걸까. 우리 엄마 아빠는 모르는 것 같은데. 심지어 집에서 그런 요리를 직접 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지금은 나도 겪어 본 이십 대 직장인 시절을 보내는 중이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처음 부임하신 곳이 우리 학교였던지라 선생님과 우리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다. 나도 이십 대가 되고,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며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본 곳도, 가볼 수 있는 곳도 많아지고 아는 음식도 많아졌다. 그때의 선생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에게도 저렇게 아는 음식이 많아지고 멋진 사진을 찍을 날이 올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런 트렌디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낀 첫 지점이 뽈뽀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 여행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스페인 문어는 정말 야들야들해, 타파스 먹고 싶다, 맛있는 하몽 찾기가 참 힘들어, 같은 말들을 해댔다. 물론 그 이후로도 나는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한 다음 단계들을 거쳤다. 쌀처럼 생겼지만 쌀이 아닌 퀴노아, 완두콩도 강낭콩도 아닌 병아리콩, 그 병아리콩으로 만든 중동식 소스 후무스, 노란 콩이 아닌 까만 콩 그러니까 서리태로 만든 콩국수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서울에서 다른 방식의 뽈뽀를 먹어 본 다음 집에서 흉내도 내어 봤다. 익힌 감자를 으깨 우유, 치즈와 함께 믹서기에 갈아서 퓌레 같은 걸 만들어 깔고, 올리브유에 바짝 볶은 문어와 마늘을 올리고 빨간 파프리카 가루와 파슬리 가루로 마무리했다. 그랬더니 얼추 유럽에서 본 거 같은 문어요리가 되었다.


나, 진짜 어른이다. 그것도 아주 멋진!


데이트를 하며 ㄷ에게—나보다 오빠지만— 음식이나 재료 이것저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와, 너는 그런 것도 알아?' 하면 나 이거 좋아해, 맛있더라, 할 만큼 취향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은 음식 종류를 많이 안다고 해서 어른인 것이야 아니겠지만은 경험이 많아지고 취향이 생기는 것이 부쩍 달갑다. 유튜브에서 MC의 질문에 어느 연예인이 삼십 대가 되고 나니 이십 대 때와 다른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싫은 게 많아진 거라던데. 공감했다. 나 역시 싫은 게 많아졌다. 그렇지만 좋은 것 역시 많아졌고, 아끼는 것들이 많아졌다. 지나가버리는 게 아까워서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이 순간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만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이미 소중한 걸 알고 있는 내가 좋기도 하다.


혹시 이거, 멋진 어른 2단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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