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입 지하에 성 발렌타인이

호미의 유럽 여행 #12. 2025년 10월 5일, 로마

by 호미

자고 일어나니 10월 5일, 로마에 온 지 나흘째. 이틀 간의 결혼식 일정이 다 끝나니 간만에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 와이프가 가고 싶어 하는 곳들이 있어서 하나씩 둘러 보기로 했다. 2025년 10월 5일은 일요일이었다. 로마에서 일요일은 좋은 게 하나 있다. 유료로 들어가야 하는 관광지들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무료 입장이 된다. 그래서 다른 날이었으면 돈을 내고 들어갔을 카라칼라 욕장과 판테옹을 공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가까운 케이크 가게를 갔다. Grué라는 곳에서 각자 하나씩 먹고 싶은 걸 골랐다. 와이프는 생크림이 듬뿍 든 마리토쪼와 오렌지 주스를, 나는 '에센자'라는 이름의 미니 케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다. 디저트를 마치고 근처를 돌아다녔다. '개구리 분수'라고 이름 붙은 분수 주변으로 예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근처엔 벼룩시장 같은 것도 열리고 있었다.


IMG_8123 중간.jpeg Grué에서 커피와 마리토쪼를 사 먹었다.
IMG_8131 중간.jpeg Grué 근처의 개구리 분수


버스를 타고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으로 이동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와서 유명해진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à)이 있는 곳인데 도착하니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어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옹 보다는 줄이 짧았지만 손 한 번 넣어 보겠다고 줄을 서고 싶진 않아서(29년 전에 손을 넣고 찍은 사진이 집에 있다.) 밖에서 구경만 하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본당 안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곳 지하실에 여러 성인의 유골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중에 발렌타인 데이로 유명한 성 발렌티노의 해골(!)이 전시돼 있었다. 순교한 날도 269년 2월 14일로 명확하고 유골까지 보존되어 있는데도 이 성인에 대한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로마 시대 현역 군인의 혼인이 금지되었던 시절에 병사의 혼인 성사를 몰래 집전해 주고 나중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얘긴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군인 결혼 금지령이 있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사실혼은 묵인되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게 서기 14년이며, 서기 190년에 이미 결혼금지령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어쩌다가 이 성인이 사랑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는... 그래도 재밌었으니 사람들은 천 년 넘게 발렌티노를 그렇게 기억해 줬고 뭐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 진실이 저 너머에 있건 말건.


IMG_8147 중간.jpeg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성 발렌타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카라칼라 욕장이다. 최근에 와이는 신 테르마이 로마이라는, 로마 목욕탕을 소재로 한 애니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로마에서 카라칼라 욕장은 필수 방문지가 됐다. 로마 제국은 나름 목욕탕의 나라이다. 많이 파괴되고 이제는 유적으로 남아 있지만 스케일을 보면 현대에 존재하는 전세계의 공중 목욕탕 중에 어떤 것보다도 큰 것 같다.


IMG_8159 중간.jpeg 카라칼라 욕장의 유적


다음으로 판테온으로 갔다. 판테온은 사실 전날 건물 앞까지 가서 본 적이 있다. 줄이 길어 입장을 포기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판테온 만큼은 꼭 안에 들어가서 보고 싶었다. 로마에서 제일 큰 돔이라고 하니까 안에서 보면 멋있을 것 같았다. 줄이 길었지만 서서 기다렸고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빠져서 금방 들어왔다. 판테온 내부는 사람이 많았지만 관리하는 쪽에서 적당히 인원을 조정하고 있어서 미어 터질 정도는 아니었다. 지붕 천장이 제일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벽에 늘어선 조각과 무덤들도 볼만했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와 이탈리아 통일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무덤이 그 안에 있고 대리석 조각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돔 천장의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 있어 하늘이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비가 오는 날에도 안으로 비가 떨어지지 않고 그 원리가 아직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장 보존이 잘 된 로마 건축이면서 가장 완벽한 로마 건축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하는데 애초에 무슨 용도로 지었는지는 모른다고. 판테온이란 이름도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뭐 제대로 아는 게 없어) 기록보다도 위대한 건 건축인가. 적어도 로마에서는...


IMG_8170 중간.jpeg 판테


로마에는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 세 개가 있는데 우린 그 중에 두 곳을 찾아갔다. 첫번째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성당 안에 마태오를 소재로 한 카라바조의 그림 세 개가 있다. 카라바조는 검은 배경에 빛의 효과가 강렬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고 그런 스타일이 그 시대엔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가도 성당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 카라바조의 그림은 확실히 눈에 띈다. 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아서 바로 나오니 근처에 나보나 광장이 있다. 배가 고파져서 광장 앞에 가까운, 피자 파는 식당을 골라 들어가서 앉았다. Il Tagliere Toscano Navona라는, 캐주얼한 식당이었다. 직원은 테이블 메뉴가 있다고 소개를 하는데, 영어로 이야기를 해도 업계 용어를 모르니 이해가 안 된다. 아마도 메뉴판에는 없는 메뉴인 거 같은데 말이 잘 안 통하니 답답했던 직원은 칠판을 통째로 떼서 우리한테 갖다 준다. (아주 큰 칠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칠판...) 메뉴 이름과 가격과 포함된 음식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보고 괜찮을 거 같아서 하나를 고르고, 먹고 싶었던 피자를 하나 주문했다. 와인도 한잔 시키고. 정말 맛있었다. 다음 카라바조를 보기 전에 마침 나보나 광장이 가까운 데 있어서 광장으로 갔다. 광장은 기다랗게 생겼는데 광장이 세워지기 전에는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있었다 한다. 세 개의 분수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거는 베르니니가 만든 것이다. 카라바조의 두 번째 성당인 산타고스티노 성당으로 이동했다. '로레토의 성모'라는, 한 점의 그림이 있는데, 2유로 동전을 넣으면 그림을 볼 수 있게 조명이 켜지고, 5분 쯤 지나면 조명이 꺼지게 되어 있다. 누군가 한 명이 동전을 넣으면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볼 수 있어 모두가 그 사람에게 감사해 하는 훈훈한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기분으로 기꺼이 동전을 넣을 수 있다. 5분마다 2유로씩 들어와 봤자 하루 종일 돈을 벌어도 액수가 얼마 안 되니 상업적이라는 느낌도 없다. 카라바조의 성당은 하나가 더 있었지만 두 번째 성당을 보고 나니 피곤해 져서 더 이상의 관광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테르미니 역 근처의 아시아 마트로 가서 우리가 먹을 음식을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로마에서의 관광은 끝났다. 이제 내일이면 토스카나로 이동한다.


IMG_8190 중간.jpeg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IMG_8195 중간.jpeg 강렬한 명암이 다른 그림과 차별화되는 카라바조의 그림
IMG_8224 중간.jpeg 산타고스티노 성당 바깥에서 본 모습
IMG_8207 중간.jpeg 나보나 광장
IMG_8199 중간.jpeg 일 타글리에 토스카노 나보나에서 먹은 테이블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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