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의 유럽 여행 #11. 2025년 10월 4일
10월 4일은 와이프의 선배인 지영 여사와 덴마크 남자친구 피터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무려 이탈리아 로마의 성당에서 열린다. 결혼식은 사진이 많지 않다. 전문 사진사를 고용했으니 개인 촬영을 자제해 달라는 혼주의 당부 말씀이 있어서 충실히 지켰고 내 사진은 결혼식이 끝나서 와이프 친구들과 밖에서 찍은 몇 장이 전부다. 결혼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사진사가 찍은 사진은 아직 구경을 못하고 있다.
어제 과음을 해서 아침에 일어나는데 좀 힘들었다. 그래도 마신 와인이 좋은 와인이었는지 머리는 하나도 안 아팠다. 결혼식은 10월 4일 오전이었는데 조금 늦었다. 우리가 늑장을 부린 탓도 있지만 버스가 말썽이었다. 구글맵은 미국에서 대중교통 정보를 정확히 알려 주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구글맵에서는 곧 온다는 버스가 실제로는 안 오고, 심지어 노선까지 달라서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GPS 정보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교통당국에서 사전에 작성된 운행스케줄표를 데이터로 쓰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은 하는데...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Chiesa del Santissimo Nome di Maria(영어로는 Church of the Most Holy Name of Mary)라는 성당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가까운 포로 트라야노 바로 앞에 있다. 비잔틴 양식의 건물인데 세로로 긴 성당이 아니라 원형으로 생겼고 중앙에 제단이 있었으며 하객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있다. 객석 의자 뿐만 아니라 제단까지 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어서 모던한 느낌이었는데 짙은 색의 대리석으로 된 성당 건물은 몇백년은 되어 보였고 높은 돔 천장에 각종 장식이 화려했다. 성당 입구에 도착하니 출입을 제한하는 로프가 쳐져 있다. 순간 우리 못 들어가는 건가 걱정했지만, 아마도 관광객의 진입을 막게 위함이겠거니 생각하고 로프를 넘어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모든 하객은 착석해 있고, 본식에 앞서 엄숙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부채꼴로 앉은 모든 하객들의 시선이 우리한테로 집중돼서 좀 쑥스러웠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는 신부가 입장할 문이어서 그랬나 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하객들이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도 신랑이 덴마크 사람이라 덴마크에서 온 분들이 제일 많았겠지만 지영 여사는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이 있다. 피로연 때 퀴즈로 나왔었는데 참석자들의 국적은 모두 열아홉이었다고 한다.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연주와 함께 혼배 미사는 영어로 진행됐다. 혼배 미사 중간에 성당 입구 문이 열려 있었는데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호기심으로 기웃거렸다.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음에는 틀림 없지만, 이 엄숙한 분위기를 깨면 안 되기 때문에 집사로 보이는 분이 관광객들을 다 쫓아냈다. 우리나라에서 혼배 미사를 하면 신자가 아닌 하객들 대부분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피로연장으로 피신하는데, 이곳은 도망칠 피로연장도 없고 로마 성당의 거룩한 비주얼에 압도된 데다, 원형으로 된 성당 구조상 움직이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너무 눈에 잘 띄어서 그런지 모두들 꼼짝 않고 한 시간을 꼬박 채운 혼배 미사에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결혼식은 화려하게 잘 끝났다. 식장 밖에서 단체 촬영이 있고 하객들은 흩어졌다. 와이프는 오랜만에 하객으로 온 친구들을 만났는데, 잠깐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결혼식 이벤트는 앞으로 두 건이 더 있다. 오후에 보르게세 공원에서 식사 없이 와인, 음료와 다과를 먹는 파티가 있고(여기서 부케를 던지더라.), 저녁에 메리어트 호텔에서 피로연을 한다.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 필수 관광지를 털기로 하고 움직였다. 여행은 아직 절반도 안 꺾였는데 이젠 뭔가 숙제를 하는 느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중엔 진짜 벼락치기도 하게 된다.) 캄피돌리노 언덕을 걸어 올라가 그냥 내려다 보는 것으로 포로 로마노 구경을 끝내고, 언덕을 내려와 조국의 제단을 본 뒤에 콜로세움 앞까지 걸어갔다. 그 다음 버스를 타고 트레비 분수와 판테옹까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파가 있었지만 우린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하면 만족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판테옹 안에 들어가지 못한 건 좀 아쉬워서 다음 날 다시 갔다.) 불편한 게 있었다면 결혼식 때 입은 세미 정장을 입은 채로 움직였다는 게 좀...
늦지 않게 보르게세 공원에 도착했고 결혼식 때 경황이 없어 인사를 못 한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하객들 중에 와이프를 아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서 인사를 계속 했고 덕분에 나도 은근히 바빴다. 와이프의 글로벌 친화력이 대단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영어 대화로 지쳐 가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시간이 지나자 그리 많지 않은 한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약간 어두운 구석의 한 테이블에 모여 떠들게 됐다. 그 중엔 와이의 과 동기이자 내 후배와 그 친구, 지영 여사와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결혼식 준비를 도와준 분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도 누군지 잘 모르겠는 분도 같이 있었다. 피터의 가족이 와서 인사를 하고 가셨고, 조금 있으니 지영 여사가 와서 우리를 다 끌고 야외로 나왔다. 신랑 신부의 감사 인사와 토스트를 하고 부케를 던진 다음 저녁 피로연 때 다시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한국에서 결혼식 할 때 부케 던지는 걸 너무 짜고 쳐서 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더라. 결국 부케 퍼포먼스는 멋진 사진을 남기기 위한 것이니...
보르게세 공원에서의 드링크 파티가 끝나니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하객들은 걸어서 근처에 있는 롬 메리어트 그랜드 호텔 플로라를 향했다. 근사한 야외 테라스가 있는 루프탑의 피로연장이었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루프탑에서 또 스몰 토크를 한다. (아까 드링크 파티에서도 한참을 토크를 하더니...) 호텔은 옛날 건물이라 기껏해야 7층 정도였던 것 같은데 로마는 아마도 고층 빌딩이 없는 것 같았다. 루프탑에서 로마가 잘 내려다 보였고 근사했다. 조금 있으니까 해가 져서 하늘이 깜깜해졌고 저녁 피로연이 시작됐다. 신부 동생이 개회사를 했고, 조카 아이의 춤 공연이 있었으며 신랑인 피터 아버지의 한말씀이 있었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라는 말에 모두가 빵 터짐.)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 못하신 신부 아버지의 축하 말씀이 영어로 번역되어 동생분을 통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동생분의 선창으로 토스트가 있었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피로연에서는 덴마크 스타일의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모두 신랑과 신부를 약올리는 것이다. 신랑이 피로연 중에 화장실을 가면 남자 하객들이 우루루 자리에서 일어나 신부에게 가서 키스를 한다. 또 신부가 화장실을 가면 여자 하객들이 우루루 자리에서 일어나 신랑에게 가서 키스를 한다. 화장실 갈 때마다 한다. 또 하나. 피로연장에서 누군가 스푼으로 그릇을 땡땡땡 치기 시작하면 모두가 동조해서 같이 스푼으로 그릇을 때린다. 그러면 신랑과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키스를 해야 하고 키스를 하면 테이블 밑으로 둘이 함께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여기서 끝나면 괴롭힘이 아니겠지만 이게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난기 가득한 하객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릇을 때리고 그때마다 신랑, 신부는 일어나서 키스를 하는데 한 열 댓번 쯤 하고 나니까 신랑 표정이 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하객들이 눈치를 챘는지 그때부터 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한때는 우리나라도 결혼식때 괴롭히는 문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정도가 심해지자 최근엔 사라진 것 같다. 뭐든 적당해야 오래 가는 법이지만 우리처럼 화끈하게 하고 털어 버리는 것도 나름 방법이지 않나 싶다.
테이블은 선착순이 아니라 모든 하객의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 만큼 그냥 놔두면 같은 나라끼리 뭉칠까봐 적당히 분산시킨 듯했다. 우리 테이블엔 우리를 포함한 두 한국 부부와 덴마크 사람 넷이 앉아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랑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데 역시나 대화를 중시하는 유럽인들이다 보니 끝나질 않는다. 식사 시작한 지 두시간이 지나서 케익과 커피가 나온 것 같고. 영어가 힘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국제적인 소셜은 솔직히 정말 오래 버티기 힘들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덴마크 하객분이 말씀하시길, 보통 댄스타임이 시작될 때까지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댄스가 시작되지 않는다. 테이블마다 와인이 레드, 화이트, 알콜, 논알콜로 네 종류가 있었는데 떨어지면 다시 채워 준다. 대화는 끝이 없고 하객들의 음주량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난 어제 이미 한계까지 마신 터였기 때문에 오늘은 도저히 무리였고, 결국 양해를 구하고 와이프와 나는 댄스가 시작되는 걸 보지 못하고 피로연장을 빠져 나왔다. 복도에서 동생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국식이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른 말로 떠나는 우리를 고맙게도 이해해 주셨다.
덴마크 결혼식은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 다음날 하루 종일 하고 밤 늦게 끝난다는 걸 알았다.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30분이 안되는 세레머니를 하고 나면 피로연장에서 각자 식사를 하고 흩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신랑 신부가 피로연장에 찾아와 돌면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는 하는데, 내가 결혼식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성당 혼배 미사가 너무 오래 걸려서 하객으로 온 친구들은 미사 중에 다 피로연장으로 도망쳤고, 단체 사진은 고맙게도 같이 찍어 줬으나 폐백을 마치고 피로연장에 가니 이미 다음 타임이 식사 중이었다. 세상에 우리나라처럼 결혼식에 짧은 시간이 소요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유럽 나라들이 의외로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룬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던 거 같은데 아닌가 보다. 그래도 하객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