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여전히 뛴다면
프롤로그
꽤 오래전 이야기예요.
그날 밤의 마음을 떠올릴 만한 ‘어제 하루'였어요.
요새의 저랑은 다르지만, 길에서 마주친 ‘예쁜 사람들’을 바라봤어요.
‘그럴 나이’의 아름다운 친구들 덕분이죠.
아스라이 아른거리는 물건을 찾는 마음으로 저의 '기억의 서랍'을 열어 봤어요.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더군요. ‘탁탁’ 먼지를 털어냈을 뿐 이전과 비슷해 보였어요.
어떤 분은 저처럼 ‘그럴 나이’는 이미 지나 버리셨을 거예요.
그랬다면 더 좋죠? 뭐. 헤. 제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여유롭게 잠시 소환해 보는 건 또 어떨까 해요. ㅎ
잠깐만 시간을 붙잡아 두시겠어요?
같이 ‘그 나이’를 꺼내보아요. 위안이 될 테니까요. 찡긋. ㅎㅎ
‘그믐달이구나.’
달이 참 예쁘다 생각했다.
그 예쁜 달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생각 한 조각 때문에,
나는 더 초라해졌다.
힘이 쭉 빠진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늪에 빠져가는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건져내려는 시도 같았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애틋한 그리움이 오히려 빠져나왔던 그 자리로 나를 다시 끌고 들어갔다.
떠나온 그 자리로 되돌아가서 거기 다시 우두커니 앉아 버리는 나의 생각.
사실, 그건 오히려 지독한 '미련'이었다.
되돌림표가 반복되는 노래처럼 붙들어 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그건 내 것이었고, 내 역할이고, 그게 나여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아무도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까.
언제든 멈추고 싶을 때 음악을 끌 수 있는 것처럼 시작된 사랑도 언제든 멈추면 되니까.
play & stop 이 가능하다면, pause버튼도 추가하면 참 편리할 거다.
안타깝게도 생명의 기원과 종말처럼 그건 원래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다.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고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없는 우리다. 그런데, 사랑은 다를 거라 착각한다. 괜스레 괴로울 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또는 자녀라 해도, 그 착각으로 힘들어지는 건 상대보다 자신일 뿐이다.
시인 칼릴지브란의 시구가 잘 설명해 주었는데 괴로움을 잠시간 거두고 단순하게 음미하면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지혜 앞에 항복하는 것은 평안을 키워가는 것이다.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면 그저 조금만 다가가자.
그리고 그대가 사랑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사랑은 그대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대의 길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칼리 지브란_ ‘사랑에 대하여’ 중
나 또한 그날은 괴로웠다.
사랑은 이미 시작됐는데 닿을 수 없다는 징계 또한 받았기 때문이다. 끌 수 없는 사랑을 영과 혼에 간직한 19살, 혹은 21살의 여인을 생각해 보라. 불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 다니는 여인이나 다름없다. ‘금지’의 징계는 오히려 그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폭언을 들으면서 ‘금지령’을 하사 받았다.
“못 돼 처먹은 것!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오늘까지야. 다시는 안돼! ”
나의 자아는 또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지만 수긍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능에 저장된 ‘불빛’을 따르려는 하루살이처럼 오도 가도 못한 채 결국 불빛 앞에서 서성거렸다. 안길 수도 없고 멀어지는 건 더 아프기만 해서 그냥 끙끙 앓았다.
아름다운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은 본래 내 뜻대로 다룰 수 없다’는 지혜에 굴복하지 않았다.
대장장이의 ‘쇠’를 달구고 때리듯 오히려 나 자신을 달구고 때렸다. 자책했다. 한숨 쉬었다.
그때도 알아야 했는데.
사랑은 인간의 의지이기 전에 '신의 선한 계획'이다.
우리의 본성과 본능가운데 이미 ‘사랑의 신비’를 정보로 새겨두셨다. DNA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이든 혹은 무엇 즉 꿈이던,
사람은 살기 위해서 사랑한다. 사랑을 멈춘 사람은 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에게 생명은 잊혀진 힘이다.
그래서 껍질만으로 살아가는 죽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왔던 삶의 순간들도 함께 잊어버린다.
연인이나 부부를 생각하면 쉽다.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둘의 관계는 죽은 게 아닌가?
껍질만으로 서로를 대면하고 그 순간을 모면하면 바로 잊어버리는 관계.
하지만 사랑은 팔닥거리는 생물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된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이 다가와도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그가, 그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본질을 이해하면 덜 힘들 텐데 사람은 그게 어렵다. 특히 자녀를 사랑할 때 더욱 그렇다.
사랑의 시작과 마침, 과정에 대한 '통제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데 이 본질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통과하는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고 여러 번 아프고 낫기를 반복한다.
의지가 강하고 똑똑할수록 시행착오는 더 강해지고 더 많아질 것이다.
통제권을 여전히 가지려는 사람의 속성 때문이다.
지혜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왔을 때 왠지 너덜너덜해진 기분도 든다.
알고 보면 이때 비로소 영혼은 순수하고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이래서 사랑은 좋지만 동시에 괴로운 과정이다.
사랑은 본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 기 때문이다. 사랑이 누군가에게 흘러가 어떤 이를 채울 수 있다. 사랑으로 채워지는 상대가 연인이던 자녀이던 혹은 어떤 하나의 집단이던 사랑을 받은 상대는 생명수를 마시는 것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새로워진다.
이런 연유로, 사랑의 시작도 멈춤도 우리의 권위로는 다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면 그 길을 따르면 된다.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을 위해 옳은 사랑을 간구하고 때로는 경청하면서. 스스로의 이기심이나 외부의 방해로 괴로워도 그 시간을 이겨내는 선택만이 우리의 몫이다. 아이러니하게 이것이 주도적인 사랑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하지 않아도 될 선택을 하는 것이 '주도'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주도적으로 응답할 기회를 갑자기 잃어버렸다.
멈추고 싶지 않을 때 강제로 금지당했던 ‘내 사랑’을, 지켜보는 것은 미련 맞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에 대한 대안도 달리 없었다. 그 자리에 돌아가서 앉고 마는 관성의 익숙함. 그것은 미련함이라고 보기에는 순수함에 가까웠다.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려고 간 것이었다.
시선의 교차를 통해 처음처럼 다시 되살아나는 열정, 지울 수 없는 나의 고백들, 환희, 미칠 것 같은 심장 소리, 이 모든 생각과 감각이 되살아 났다. 그 감각이 피부 돌기처럼 몽글몽글 맺혔다. 자극받은 살갗은 두려워 떠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기도 했다. 그러다 온몸이 마비를 일으켜 생각과 움직임이 내 의지를 반영하지 못했다. 분노라기 생각하기에는 부러움이 훨씬 더 컸다.
서글픈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시간을 꼼짝 않고 소유하려 들었다. ‘내 사랑’을 지켜보고 바라보며 애가 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온전한 사랑과 연결된 '소유의 끝자락'이었으니까. 가느다란 실을 붙잡은 그 짧은 시간 속에서라도 꿈을 꾸고 싶었다. 중독된 자극에서 벗어나려면 달아나야 하는 것도 알았다.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갈 수 있었다면 나는 이미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랑 앞에서 항상 약자였다. 좌뇌의 이성이 금단현상의 고통을 걷어갈 수 있다면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앎의 지시를 따를 수 있으련만.
연극이 끝날 때까지 정지 화면처럼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딱 붙어 있었다.
끝이 언제인지 나 자신은 모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윗글은 20대 겪은 마음의 불에 관한 기억입니다.
이후부터는 현재의 저입니다. ㅎ 다시 헬로우 ~ ㅎㅎ
밝히자면 제가 사랑한 대상은 '연극'이고 즉 '저의 꿈 연기자가 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ㅎㅎ
위의 글을 일부러 연극 대신 '사랑하는 남자'를 이입해서 써봤습니다.
깜쪽같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감사합니다. 저자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셨으니까요. ㅎㅎ
연극을 고등학교 때 몰래 하다가 무섭고 권위주의가 심한 아버지께 들켰습니다.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혼났고, 그 뒤로는 연극 근처에 얼씬거릴 수 없었습니다.
뭐 다 제 탓입니다.
그래서 20대 연극을 보러 자주 다녔습니다.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 밤은 어김없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무슨 불덩이가 내 심장 안으로 들어와서, 짐승처럼 거칠게 숨 쉬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하고 싶고, 너무 그리운 무대였고, 너무 간절한 느낌들이 되살아 나는 밤들이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를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이기적인지라, 사람보다는 꿈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2016년에 기회가 생겨 다시 무대에 섰습니다.
욕심 많아서 대사 분량 많은 역할로요. (브이^^)
그 뒤로는 다시 또 내려왔습죠. 허허 ~
ㅎㅎ 예술인으로 살기에, 저는 이미 '때'가 많이 묻어 있더라고요.
압구정 강남 대치에서 '돈' 맛을 이미 본 제가 예술인으로 바닥부터 시작하기는 늦었다는 계산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예술가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삽니다.
연극은 이제 잘 보지 않습니다. 하하. 넷플릭스 보느라. ^^;
추신> 영감을 받았던 음악 첨부해용 ~ 여주 남주 너무 예뻤더라요...
더운 여름.. 시원한 밤(night) 선물로 드려요 ~ 헤헤
https://youtu.be/2Ze9K24riyA?si=5sAb7vZda-c8BdC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