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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Feb 26. 2024

심미적이고 양심적인 도둑

눈사람 머리 실종 사건


 미국 도착 8일 차.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계시는 어머님과 식성 좋은 남자들-아버님, 남편, 아들-을 위해  요리하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났다. 그동안 외출이라고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두어 번 다녀온 게 다였다. 그러다 문득 어두운 거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다크 서클이 시커멓게 내려앉은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간 시댁살이를 결정한 것은 솔직히 말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아무리 시댁이 미국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결정은 어찌 보면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는데 이곳까지 와서도 살림에 치여 정작 아이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라도 구경을 다녀올까 싶어 창문 밖을 내다봤다. 집 주변은 아이를 향해 쌓인  미안한 마음만큼이나 수북하게 눈이 쌓여있었다.


 십 년 만에 본가를 찾은 남편은 마치 신생아로 회귀한 듯 하루 종일 계속해서 잠만 잤다. 한국에서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출근했다가 늦은 밤 퇴근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잠결에 눈을 떠보면 그는 늘 핸드폰으로 세계 증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그는 원래 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주말에도 새벽 벌떡 일어나 운동 다녀와서 아이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출근하기에 더더욱 그렇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주일 내내 잠에 취해있는 그를 보니 지난 세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고된 나날을 보냈구나 싶어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 아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북 속에 푹 파묻혀 잠에 취해있는 남편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아이랑 눈사람 만들어요. 눈이 녹기 전에!

 나는 손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 특성 때문인지 늘 손가락 통증에 시달리는데 여기 와서도 종일 살림하다 보니 통증이 더 악화되었다. 이런 손으로 차가운 눈을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힘겹게 눈꺼풀을 뗀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에게도 함께 나가자고 조르는 아이에게 눈사람을 어느 정도 완성하면 나가서 사진 찍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슬슬 다음 끼니 준비를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밖으로 나가보니 무려 삼단짜리 눈사람이 눈밭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남편보다도 키가 큰 눈사람이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강이가 눈에 푹푹 파묻힐 만큼 함박눈이 펑펑 눈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차가운 눈을 얼굴에 맞아가며 눈으로 코팅돼 하얗게 꽁꽁 언 장갑을 끼고 두 팔을 활짝 벌려도 다 감쌀 수 없었을 만큼 커다란 눈덩이를 낑낑대며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뭇가지로 눈, 코, 입을 꾸며주고, 헝겊을 목에 둘러준 뒤 완성된 눈사람을 보고 느꼈던 희열. 그때의 감정이 깊은 곳에서 스며 나와 나를 둘러싼 한기를 녹였다.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당근과 사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아이 아빠는 텃밭을 살펴 원예용 핀과 막대를 찾아왔다. 우리가 내민 재료로 아이는 동그란 초록색 눈에 긴 주황색 코와 새빨간 입술을 지닌 눈사람을 완성했다. 완성된 눈사람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아이의 모습에 내가 어린 시절 눈사람을 만들었던 때보다 더 큰 뿌듯함이 가슴을 채웠다.



 며칠 뒤, 장을 보고 돌아오니 아이가 나를 향해 인사 대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눈사람 머리가 사라졌어요!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가? 왜? 검은 그림자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눈사람이 있는 쪽 문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블라인드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삼단짜리 커다란 눈사람은 두 단짜리 꼬마 눈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놀라고 두렵고 속상했을까. 아이가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이는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몇 개월 전만 같았어도 대성통곡할 만한 사건이었는데 그새 아이가 훌쩍 컸음을 실감했다.


 남편과 속닥거리며 범인을 추정하기 시작했다.


"혹시, 개나 사슴 같은 동물이 그랬을까?"

"그러기엔 머리만 너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어. 눈덩이가 깨진 흔적도 없고, 장식품들도 흩어져 있지 않고."


 "동네 아이들?"

 "이 근처에 아이들이라고 해봤자 대여섯 살 아이들 두세 명이 있을 뿐인데.... 머리 위치가 너무 높고 무거워서 아이들이 가져갈 수가 없지."


 "행인이었을까? 아니면 배고픈 걸인? 사과라도 먹으려고?"

 "이 공간은 집들로 둘러싸인 공용 구역이라 길에서는 보이지 않잖아. 게다가 이 동네는 안전해서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고 지내기도 한다는 부모님 말씀 자기도 들었잖아."


 "아, 렌트해서 공동 생활하는 앞집 대학생들?"

 "우리한테 도움 줬던 애들? 걔네가 왜? 방에 숨겨두려고?"


 다른 부위도 아닌, 눈사람의 머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눈사람을 볼 때마다 불안감이 감돌았지만, 끝내 범인을 밝히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며칠 뒤 기온이 올라가고 이틀 내내 비가 내리면서 눈사람이 녹아버리며 찝찝한 마음도 씻겨가던 중 창밖을 보던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눈사람 머리가 돌아왔어요!

 아이의 호들갑에 창밖을 내다보니 눈사람 머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아진 눈덩이가 눈사람이 녹은 자리에 놓여있었고, 그 앞에는 눈, 코, 입으로 사용했던 당근과 사과, 원예용품이 반원 형태로 얌전히 놓여있었다. 추운 날씨에 눈에 박혀있었기 때문인지 사과는 도려낸 부위가 갈변조차 되지 않았다. 돌려받은 물건조사하며 우리의 자산(?)을 깨끗하게 돌려준 것을 보니 범인이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몹시 나쁜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당에 있던 눈사람 몸통은 흔적도 없이 녹았지만, 범인이 가져다 놓은 머리 부분은 아직 다 녹지 않은 걸로 보아, 범인은 눈사람 머리를 어느 응달에 잘 숨겨놓고 감상하다가 돌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 사건을 미국인들이 만든 전형적인 눈사람과는 달리 이국적인 외형을 지닌 눈사람에게 매료된 한 이웃이 눈사람을 실컷 감상한 뒤 정신이 들자 다시금 작품을 되돌려 준 해프닝이었다고 잠정 결론지었다. 나는 앞으로 눈이 펑펑 쏟아지거나 눈사람을 보게 될 때마다 정체불명의 ‘심미적이고 양심적인 도둑이 떠오를 듯하다. 우리 아이에게는 눈사람에 관한 어떤 추억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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