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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oneyberry

여름의 숨결

by 허니베리


“아이도 아직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데, 아버지 간병까지 힘드시겠어요.”

동료의 말에 고개를 저었지만, 아니라는 답은 차마 하지 못했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렸다. 서너 살 된 아이의 손을 잡은 여자가 마주 걸어왔다. 큰 키에 앙상한 몸. 허리띠로 조였지만 바지는 흘러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여자의 앳된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에게 아무런 대꾸도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남긴 스산함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아이의 머리는 엄마 허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높이 치켜든 팔이 저릴 텐데. 우리 아들이 저만했을 때, 말랑말랑했던 손의 촉감이 되살아났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팔을 잡아당길 때마다 내 어깨와 손목에 미세한 통증이 겹겹이 쌓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칭얼대며 팔을 흔들었다. 아이 손이 여자의 허벅지를 툭 건드리자, 그녀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엄마 때리지 말라고 했지! 엄마는 아픈 거 싫어!”

여자는 가슴 앞에서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이는 엄마의 나풀거리는 바짓자락을 붙잡고 울먹거렸다.

엄마가 땅에 박힌 듯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엄마로 서 있던 나는, 어느새 저 작은 아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 엄마가 아이를 낚아채듯 끌고 멀어져갔다. 머뭇거리며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다시 집으로 향하다가 병원 앞에서 멈춰 섰다.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고 있었다.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중년 여성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뒤따라갔다.

나 역시 몇 달 전, 아버지를 모시고 찾은 곳이었다. 혈당계의 경고음,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 그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왕복 8차선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크게 소리 질렀다. 이 남자는 동네 풍경이 된 지 오래였다. 욕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한 음성이 오늘은 하늘을 향한 외침처럼 들렸다. 언젠가부터 이 소리가 얼음처럼 시원하게 귀에 떨어졌다.


보행자 신호등에 불이 켜졌다. 노인 한 분이 진흙밭을 걷는 것처럼 한 발짝 한 발짝 힘들게 떼며 길을 건넜다. 그가 붙든 유모차 안에는 개 한 마리가 혀를 길게 빼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유모차가 덜컹거리자, 고개를 서서히 들더니 길가를 살펴보았다. 눈곱 잔뜩 낀 눈에 그렁그렁 물이 차올랐다.


신호등이 깜빡였다.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뒤로 물러나 더욱 천천히 발을 옮겼다. 항암치료 이후, 걷는 것이 이전 같지 못하신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리는 우리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열 번의 여름을 통과하며 아이의 손이 제법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뜨겁게 일렁이던 아지랑이가 사라진 자리에 지나온 풍경들이 어우러져 피어올랐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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