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버스에서 내린 곳이 마침 남편 사무실 근처였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함께 밥 먹자고 한 번 던져본 말에 그러자는 남편의 답을 듣고는 놀라고 말았다. 늘 점심, 저녁 식사 약속이 잡혀있는 그이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거리에 멈추어 섰다.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확대경도 아닌데 자글자글한 주름이 비쳤다. 길에서 마주칠지 모르는 남편 지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스크를 꺼내다가 집어넣었다. 추레한 옷차림에 검정 마스크까지 쓴 모습은 오랜만의 데이트에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낙엽처럼 마른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멀리서 남편이 걸어왔다. 무채색 복장을 세련되게 갖춰 입은 인파 사이로 단풍잎같이 빨간 점퍼가 눈에 띄었다. 나도 저이가 부끄럽지 않은데, 저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마스크 벗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나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건물주 할머니의 성공담에 관한 남편의 맛깔난 이야기에 빠져 길을 돌아서 가고 싶은 마음조차 들었다. 발에 밟히는 낙엽의 질감이 매끄러웠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비빔국숫집이었다. 입맛 다른 나와 남편이 공통으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다. 하지만 둘 다 배가 고프지는 않아 곱빼기 한 그릇과 만두 한 접시를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다.
국수가 눈앞에 차려지자, 비빔장의 매콤하면서도 시큼 고소한 향이 확 퍼졌다. 입맛이 돌며 얼른 입에 삼키고 싶어졌다.
"아, 맞다."
젓가락을 드는 순간, 남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리뜬 눈과 낮은 톤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있었다. 남 눈치를 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뻔하다.
"아까 어머니랑 통화했는데...."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다.
"OO이가 초등학교 졸업한다네. 이번 겨울에는 부모님께서 한국에 들어오기 어려우시대. 대신 우리 식구들이 형한테 가서 축하해 주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아니. 난, 아니."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보다 나이 어린 형님의 나를 향한 앙칼진 고함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머릿속과 달리 테이블 위에는 정적이 흘렀다. 남편이 가위를 들고 국수를 잘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너무 잘게 부술까 봐 무서웠다. 네 번째 가위질을 할 때, 그의 손등을 잡고 싶었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은 가위질을 멈추었다. 그가 내게 국수를 권했다. 그릇을 미는 손도, 국수를 뜨는 손길도 축 늘어졌다. 차가운 국수가 들어가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맛이 어때?"
"파스타집인가, 국수를 알단테로 삶았네. 소스는 유명 국숫집을 흉내 내긴 했는데 맛은 따라잡질 못하고."
나도 모르게 불평을 내뱉었다. 남편이 말없이 냅킨으로 이마를 닦았다.
지난 십여 년의 결혼생활 동안 형님에게 쌓인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올라왔다. 모두에게 착한 남편, 따라서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차마 고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떠올랐다. 이 내용들을 소설이나 드라마로 엮는다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숨 막히는 이야기라는 반응이 쇄도할 것이다. 더불어 나를 향해서는 공감과 위로를 넘어서 답답하다는 비난이, 상대편 인물들을 향해서는 폭언이 쏟아질 것이다. 그런 글은, 쓰지 말자.
남편은 묵묵히 국수를 넘기며 슬쩍 내 안색을 살폈다. 며칠 전,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장어집에 간 일이 떠올랐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위해 선뜻 비싼 용장어를 주문하던 그의 눈빛은 선함으로 가득했다. 이 사람을 가운데 두고 더 이상 화살을 피하고 싶지는 않다.
평소와 달리 잠자코 젓가락질하던 나는 국수 그릇이 바닥을 보일 무렵에서야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볼게."
그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처남이랑 장인 장모님께 잘하잖아."
이 반응 역시 예상했던 바였기에, 적절한 볼륨으로 언성을 높였다. 나의 화를 표현하면서도, 그의 화를 돋우지 않을 정도의 음색과 음량이었다.
"내 동생이랑 우리 부모님이 자기한테 나쁘게 군 적 있어? 그렇다면, 자기는 친정 식구 보지 않아도 좋아."
함께 산 십 년의 세월 덕분인가. 그 역시 연기 톤으로 응수했다.
"설령 내게 그러셨다 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여기에서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처가에서 나와 같은 일들을 겪었다면, 자긴 견디지 못했을 거야.' 이 말은 봉인한 채.
처리할 일이 있어 사무실로 가봐야겠다는 그가 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줬다.
"왜 이래? 어색하게?"
"혈당 관리."
늦은 밤, 다시금 남편과 얼굴을 마주했다.
“근데, 아까 국수 너무 많이 자르더라. 좀 놀랐어.”
“자기 편하게 먹으라고. 옷에 국물 튈까 봐.”
“국수는 길게 뽑아 먹어야 오래 산다는데.”
시시한 말을 주고받는데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찾아왔다.
"자기야, 나보다 오래 살아서 나 좀 묻어줘."
방패가 아닌 가운데 끼어있기만 한 남편을 향해 소심히 복수하듯 말했다.
"어디에 묻어줄까?"
그가 '톰과 제리'의 제리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우리만의 농담으로 무장 해제되어, 오늘도 평온한 밤을 맞이했다. 빨간 비빔국수가 소화되지 않은 채 여전히 명치에 걸려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