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검은색 도로 위에 초록과 붉은색 신호등 불빛이 반사되며 길게 늘어졌다. 줄지어 선 차를 바라보다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이 시간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두세 명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퇴근길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여덟 시가 가까웠다. 다행히 아이는 밥을 먼저 챙겨 먹었다. 부랴부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배고픔을 참으며 필라테스를 하다 보니 동작이 아닌, 음식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숟가락으로 국물 떡볶이의 자작한 국물을 퍽퍽 떠먹고 싶기도 했고, 골뱅이무침에 하얀 소면을 쓱쓱 비벼서 꿀꺽 삼키고 싶기도 했다. 바싹하게 튀긴 닭은 그 두 가지 모두 어울리니 일단 통닭을 주문하기로 결정하던 찰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사가 내 쪽으로 다급히 다가왔다.
“회원님, 무슨 일이세요? 통증이 있으세요?”
“네, 몇 개월 전부터 어깨가 아팠는데 깜빡하고 동작을 따라 하다가 그만....”
수업을 마친 후 강사와 대화를 나눴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사실, 바빠서 병원에 못 가봤어요.”
“제가 회원님 통증에 대해 알아보고, 운동법도 공부해 올게요.”
강사가 인사를 하고 떠나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증상을 보니, 어깨에 석회가 낀 거 같아요. 저도 비슷하게 아팠거든요.”
처음 보는 이와 차가운 필라테스 강의실 바닥 위에 한참 동안 마주서서 얕고 위험한 의료 지식을 공유했다. 그 아주머니와 몇 차례나 번갈아 정수기 물을 받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미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피부를 에는 밤공기는 마치 살얼음이 촘촘히 박힌 듯했다. 한기가 몸을 파고들자, 허기가 심하게 느껴졌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대신 간단하게 먹기로 마음을 바꾸고 집 앞 슈퍼로 향했다. 냉동 코너 앞에 선 순간, ‘간단하게’라는 결심이 무색하게 냉동전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물론 맥주도 함께.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 때문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지 계산대 앞은 한산했다. 냉동전의 바코드를 찍던 계산원 아주머니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이거, 맛있어요?”
아주머니의 말투는 냉동전을 파는 사람이 아닌, 전집에서 갓 부친 전을 사는 사람 같았다.
“먹어보니 바싹하고 맛있더라고요.”
“오, 생각보다 비싸지도 않네요. 그동안 고민했는데 사 먹어 봐야겠네요.”
“전 한 장 부쳐 먹으려 해도 재료도 이것저것 필요하고 번거로운데, 일단 간편하니까요.”
“근데, 오징어는 많이 들었어요?”
아주머니의 진지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아뇨, 별로요.”
아주머니는 그새 실망하는 눈치였다.
“많이 들어있진 않아도 감칠맛 나니 먹을 만했어요.”
아주머니의 얼굴에 다시 기대감이 돌았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계산원 분이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어깨를 살짝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몸짓에 그분과의 일화가 떠올랐다.
몇 개월 전,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새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 노인분이 아주머니가 봉투에 물건을 넣어주지 않았다며 큰 소리로 모욕을 주었다. 이곳은 모두 손님이 물건을 직접 담는 시스템이었다. 뒤에 서 있던 내가 보다못해 할아버지를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나에게까지 분노를 쏟아내고 사라졌다. 그가 걸친 매끈한 머플러와 갈라진 목소리의 부조화가 정신을 산란케 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물건의 바코드를 찍던 아주머니에게 신고할까요,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멀찍이 서서 수군대는 직원들을 흘깃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내 눈을 피했다. 그때, 계산대 벨트 위에 눈물이 뚝 떨어지더니 넓게 퍼졌다. 내 전화번호가 담긴 영수증을 아주머니에게 슬며시 내밀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영수증을 건네받는 아주머니의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지금은 손님들을 대하는 아주머니의 눈빛과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나는 옆 계산대에 줄을 서서, 가끔 아주머니 목청이 커질 때면 양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을 텐데 복작복작한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청각이 깨어났다. 위태로이 달린 묵직한 감이 마른 가지를 휘게 하는 소리, 떨어진 낙엽이 사그락 사그락 거리를 훑는 소리, 구멍 뚫린 나무 기둥 사이로 바람이 쉭쉭 통과하는 소리. 이전에는 스산하던 소리가, 적막함을 지워주는 자연의 울림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