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겨울밤이었다. 카페의 어둑한 조명 아래 그와 마주 앉았다. 내 마음이 크리스마스 장신구처럼 반짝이며 일렁였다. 우리 두 사람 사이로 캐럴이 낮게 흘렀다. 뱅쇼 향을 맡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요.”
그가 손에 컵을 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경에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더욱 큰 용기가 필요했다. 반복된 말은 농담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까.
“상한 씨, 사랑해.”
내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그가 신속하게 답했다. 오랫동안 기다린 순간이었다는 듯.
“나도.”
과일의 달콤함과 알코올의 나른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퍼졌다.
“나도, 나를 사랑해요.”
거짓말처럼 캐럴이 끝나고, 술기운도 확 깼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어이없게도 나는 본인에 대한 사랑 고백을 하는 이상한 씨와 결혼하고 말았다. 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여전히 나는 이상한 씨를 사랑하고, 이상한 씨도 변함없이 이상한 씨를 사랑한다. 이 남자의 당당한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그와 결혼할 거라고 맹세하고, 그는 다음 생애에는 무생물로 태어날 것이라고 화답하며 작은 집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하지만, 변심은 여름철 미풍처럼 찾아왔다.
‘그 남자’는 이전부터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허름한 차림새의 평범한 청년이 어느 날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검은 슈트를 말쑥하게 입고 나타나자, 나의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무심한 듯 다정한 ‘그’의 눈길에 나는 소녀가 된 듯 어쩔 줄 몰라 했고, ‘그’의 손길이 닿을까 봐 간질간질했다. 솔직히, 남편과의 연애도 이와 똑같은 패턴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춥다고 하면 '뛰어!'라고 외쳤던 반면, ‘그’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헐벗은 발을 위해 신발을 들고 찾아가는 남자였다. 한때 다독가였으나 지금은 질풍노도 청소년처럼 어두운 방구석에 틀어박혀 유튜브 쇼츠에 몰입하는 남편은 나를 더 늙게 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은 지적(이었으나 현재는 유튜브 중독자)인 남자를 사랑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소환했다.
어느 날 밤, 남편이 소파 위에 놓인 책을 협탁 위에 툭 던졌다.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책, 소중히 다뤄줘요! 우리 박 대표님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란 말이야.”
나를 향한 남편의 눈길에 서늘함이 스쳤다.
그즈음 나는 매일 밤 남편 몰래 푸른 열차에 탑승하여 ‘그’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주. 더 이상 남편에게서 어긋난 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차마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기회를 노리다가 물을 마시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고백했다.
“나, 다음 생애에는 박정민이랑 결혼할 거야.”
내 말이 끝나고 우리 둘 사이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남편이 ‘탁’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나 슬픔으로 해석하기에는 애매했다. 얼굴 근육 속에 ‘희락’이 절묘하게 숨어있었다.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흠. 그러니까....”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결심, 절대 변하면 안 돼요.”
그의 눈빛은 흡사 감옥 섬에서 탈출하기 직전, 자유를 꿈꾸는 빠삐용 같았다. 곧 바다에 뛰어들 기세였다.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화면 가득 넘실대는 바다 아래에는 아가리 연 상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나서는 남자의 서사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남편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이 나를 현실 세계로 이끌었다.
"취소! 난 당신만 계속 쫓아다닐 거야. 영원히."
남편의 얼굴에는 마치 탈옥 현장에서 잡힌 죄수처럼 절망감이 감돌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2인실 감옥에서 다시금 서로를 마주했다.
축 늘어진 어깨, 하지만 왠지 발걸음은 가벼워 보이는 남편을 바라보며, 불현듯 저이가 정말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찐득이를 잔뜩 붙인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간에 이로써, 박정민 씨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대단한 나를 만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박 대표님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을 덮으며, 맨 뒤 페이지에 박정민 님의 필체로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온전히 완주하시고, 더욱 행복하시길.’
늦은 밤이라는 것도, 내 마음을 남편에게만 두기로 결심한 것도 그새 잊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와, 박정민 님 친필이네!”
남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박정민, 몇 살인데?”
“몰라. 그게 중요한 거면 자기랑 결혼했겠어?”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금세 코를 골았다.
한때 이 사람 역시 근사한 ‘연하남’이었지.
상한 씨와 나, 우리 두 사람,
온전히 완주하고,
더욱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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