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미역처럼 찰랑이는 긴 생머리, 반짝반짝 윤나는 희고 맑은 피부, 작은 달걀형 얼굴에 담긴 반달 모양의 커다란 눈과얼굴의 균형을 팽팽하게 잡아주는 오뚝 솟은코. 거기에 훤칠한 키에 늘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 이 외모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다니는 필라테스 학원 강사이다.
“자, 두 팔은 손끝까지 에너지를 쭉 뻗어 알라스콩, 다리는 포인, 빠세!”
우아한 몸짓과 함께 강사의 입에서 발레 용어가 춤추듯 흘러나올 때마다, 그녀는 부상으로 인해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비운의 발레리나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곤 했다. 강사가 이따금 미소를 보일 때면 선녀 이야기는 이런 여인을 보고 지어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싱그러운 복숭아와 청포도만 먹고, 더러운 땅에는 발을 딛지 않고 살 것만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까치발 자세를 좋아하나? 어휴, 초등학생 같은 생각은 접고, 운동에만 집중하자, 집중! 기구 필라테스는 집중하지 않으면 부상의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잠시라도 한눈팔면 안 된다.
강사의 설명에 따라 척추를 분절하며 고개를 아래로 숙이는 순간, 내 앞사람의 체어 아래에서 진갈색 생명체가 기어 나오는 장면을 포착했다. 흠칫 놀라 그것의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썼으나, 습기 때문에 안경을 벗어놓은 탓에 쉽지 않았다. 바퀴벌레인가? 바퀴벌레라면 저렇게 느릴 리가 없지. 돈벌레? 돈벌레는 길쭉한데 저건 먼지를 뭉쳐놓은 것 같잖아. 그렇다면, 머리카락 뭉치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내 신경이 온통 운동이 아닌 정체불명의 생명체로 집중됐다. 그 녀석은 나의 관심에 호응이라도 하듯 내 쪽으로 기어 왔다. 마침 선 자세에서 다시 한번 허리를 접어 바닥으로 머리를 떨구던 참이었는데, 덕분에 내 발 앞까지 다가온 녀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몸통 길이만도 3cm가 넘어 보이는 거대 거미였다. 거미는 자기를 향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점 거리를 좁혀가는 나의 머리통을 보고 겁먹었는지 내 대각선 앞쪽에 놓인 체어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강의실을 훑어보았다. 체어는 두 줄로 놓여있었다. 내 바로 앞자리에서는 복싱 선수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다부진 몸매의 아주머니가, 그 옆자리(공간 감각이 뛰어난 분이라면 눈치챘겠지만, 지금 거미는 이 자리를 향해 다가가는 중이다.)에는 거식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정도로 비쩍 마른 젊은 아가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뒷줄에는 나와, 한국말을 거의 못 하는 외국인 이렇게 두 사람이 어색하게 서서 운동 중이었다.
왕거미다!
머릿속으로 왕거미 등장에 관해 외치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지금 막 체어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작을 시작했는데, 왕거미의 존재를 알리면 어떻게 될까? 커다란 눈을 토끼처럼 더 크게 뜨고 꺅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하러 뛰쳐나가는 강사의 모습과, 그 소리에 놀라서 체어에서 우당탕탕 떨어지는 강습생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문제라면 아무래도 힘세고 용감한 아줌마가 나서서 조용히 해결하는 게 맞지. 내가 힘센 아줌마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다지 용감하지는 못하다. 미적거리는 동안 말라깽이 아가씨를 향해 진격하던 거미가 갑자기 진로를 틀어 내 앞자리 아줌마에게로 스멀스멀 기어갔다.
'오, 잘했어! 저 아주머니야말로 너를 제대로 처리해 줄 힘세고 용감한 적임자이시지. 하하하.'
나는 아줌마의 뒤통수에 눈빛을 쏘아 거미의 존재를 알렸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아주머니는 이내 거미를 발견했다.
'자, 힘내세요! 한 방에 날려버리시라고요! 파이팅!'
하지만 나의 열띤 (마음속) 응원은 별효과가 없었나 보다.내 쪽으로 몸을 돌려 거미를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겁으로 일그러졌다. 아주머니는 오른쪽 첫째, 둘째 발가락 사이에 매트 끝을 끼워 꼭 집더니 매트를 털었다. 매트가 펄럭이면서 거미가 공중으로 붕 떠올라 아주머니의 대각선 뒤, 그러니까 내 옆쪽으로 휙 날아갔다.
거미가 날아간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외국인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 아가씨에게 거미의 존재를 알려줘야만 했다. 이역만리 타국살이가 쉽지 않을 텐데 거미를 보고 식겁해 기구에서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암. 그런데, 거미가 영어로 뭐였더라?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은 지 오래라.... 아 맞다. 스파이더! ‘헤이, 워치 아웃! 스파이더 이즈 커밍 투 유,’라고 말하면 되나? 잠깐, 스파이더 앞에 the를 붙여야 되지 않을까? 재는 '그' 거미잖아. 또 잠깐, 커밍보다는 어프로우칭이 더 멋져 보이지 않나?멋지기는 개뿔, 발음은 어쩔 건데? 에라, 그냥 모른 체 하자. 그때, 강사가 내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회원님, 어디 불편하신 데 있으세요?
"저기, 거미가...."
강사와 수강생들이 놀라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조용히 속삭였다. 강사의 눈이 내 시선을 따라 꿈틀거리는 왕거미에게 향했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는 아주 우아한 발걸음으로 거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떨궈 잠시 거미를 내려다보더니 곧이어 희고 아름다운 발로 거미를 지그시 밟았다. 그녀가 발을 떼자 매트 위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미의 몸속에서 흘렀을 액체와 그 액체를 감싸고 있었을 몸통이 분리되어 마블링 무늬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거미를 밟았던 다리를 부드럽게 들어 올려 반대편 허벅지 위에 안정적으로 올리더니 발바닥에 붙어있는 거미의 내장과 다리를 기다랗고 얇은 손가락으로 쓱쓱 털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사건의 전말을 흘끔흘끔 지켜보던 다부진 몸매의 아줌마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뒤로 강사의 아름답고 우아한 몸짓을 볼 때마다 그녀의 모습에서 발레리나가 연상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불손한 단어가 떠오른다. ‘미모의 킬러’. 무, 물론 사람을 죽이는 킬러는 아니고, 벌레 전문 킬러. 운동할 때마다 이러한 몹쓸 상상이나 하니 근육량이 늘 제자리걸음이지. 아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