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편지(To. Viktor Lowenfeld)
2021년 10월 2일
서대문에서
친애하는 로웬펠드 님,
사후 편지를 보내는 형식의 작업을 택했을 때 '이게 과연 가능한가?' '내가 혼자 묻고 답해가며 쓸 수 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편지를 쓰면서 혼자 놀랐습니다. 로웬펠드 님의 책 내용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강하게 의견을 밀어붙이는 제 모습에요. 또 동료와 길을 가다 경의선 책거리에 가득 펼쳐진 꽃을 보자 동료가 "우와 여기 로웬펠드 많다!" 이럽디다. 저희 글을 읽는 유일한 사람 같은데요. (두번째 편지 이미지 참고)
그에 대한 제 대답이 더 황당했습니다. "아닙니다. 저기 저 길 끝에 진짜 로웬펠드 님의 꽃이 한송이만 있어요"라고 하면서 속으로 '나 왜 이러지?? 로웬펠드 님이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네'라고요.
이쯤 되니 영화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캐스트 어웨이'인데요 영화를 보면서 '배구공을 친구처럼 생각한다고?' 아무리 무인도라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로웬펠드 님이 어느덧 제겐 '배구공 윌슨' 그보다 더한 스승님 아니겠습니까?
부분을 합쳐서 살펴보겠습니다.
나의 윌슨 님 잘 들어보시고 답변해주세요!
흔들선 문:
로웬펠드 님은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정신적 성장은 분리되어 성장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교육에서 이러한 동시적 성장이 많이 무시된다고 했는데 2021년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융합교육이라고 해서 다방면으로 협업하며 교육은 모든 것을 동시적으로 고려합니다.
"통합이란 미술 이외의 다른 교과들과의 상호관계나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통합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입니다"라고 하신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로웬펠드 답:
먼저, 저는 배구공 윌슨도 당신이 생각하는 길쭉한 꽃도 아닙니다. 나의 사적인 연구 자료를 언젠가 찾는다면 나에 대해 정확히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답변하겠습니다.
자, 예를 들어볼게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해변에 처음 상륙하는 개척자를 주제로 삼아 엄밀한 의미에서 사건에 대한 삽화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삽화로 통합된 경험과 감정을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라 생각해요. 대신 "만일 너희들이 상륙하는 사람들 무리의 한 사람이라면 느낌이 어땠을까?" "밝아오는 새벽의 젖어 있는 찬 공기 속에서 커다란 배에서 보트로 내려오는 개척자 중의 한 어린이 었다면, 보트가 파도 때문에 위아래로 출렁거릴 때 너희들의 느낌은 어떻겠니?"라고 한다면 파도는 선이 되면 그 선은 파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가 더 이상 다른 것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강하게 통일되는 거죠. 동기부여는 충동을 자극하는 데 꼭 필요하며, 그 표현은 궁극적으로 통합된 미술 경험의 결과로까지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흔들선 답:
오늘은 윌슨 이야기나 하면서 가볍게 쓰려했는데, 또 한 번 단단한 미술교육에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융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모호함이 동기부여와 자극, 사고의 확장을 통해 통합'되는 결과를 예시로 보여주셔서 기억에 잘 남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윌슨 이야기는 유머입니다. 로웬펠드 님과 저는 유머 코드도 앞으로 맞춰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존경과 진심을 담아,
흔들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