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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Jun 02. 2020

보이스피싱

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당한 기억

퇴근길 지하철 안. 발 디딜 틈만 겨우 있는 이곳에서 억지로 휴대폰을 귀에다 대는 나. 전화를 받는다. 어느 통신사다. 잠깐. 뭐? ARS를 연결한다고?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에 도착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밀치며 내리고, 또 밀치며 오른다. 윽. 귓가에 들리는 숫자. 버튼을 누른다. 그러니 휴대폰 너머로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뭐라고 웅얼거리다 끝에, “개통하시는 거 맞나요?”라고 말한다. “네?” 같이 구겨져 서 있는 옆 거대한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아 어서 해치워 버리자. “네네네.” 뚝. 해치웠다. 잠깐만. 그 통신사는 내가 이전에 사용한 통신사로 즉,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 통신사인데? 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이렇게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나. 엄청난 속력을 뽐내며, 집에 도착한 나. 자, 심호흡 하자. 통신사에서 전화가 왔으니,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휴대폰. 그래 휴대폰! 노트북을 켠다. 내가 이렇게 타자 치기에 소질이 있었나. 엄청난 타자 속력을 뽐내며, 갖가지 검색을 해본다. 그러다 ‘msafer’라는 사이트를 알아낸 나. 가입현황 조회 서비스를 누른다. TV, 휴대폰, 이 두 가지는 내가 이용하는 통신사인데... 문제의 번호 하나. (이 사이트는 번호 조회도 가능하다) 아까 전화가 온, 그 통신사에서 내가 사용하지 않는, 허락한 사실이 없는(?), 휴대폰이 개통된 사실을 알게 된 나. 이걸 어쩌지?! 아. 기억이 스친다.


그때였을까. 얼마 전 단골 프랜차이즈 카페에 간 나. 골드회원으로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해 여유 있게 제 할 일을 하던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든 짐을 제자리에 두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똑딱이가 열린 지갑이 에코백 입구로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손을 댄 것 같은 이 기분.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내 할 일에 돌입했다. 평소 지갑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내가, 왜 들고 갔는지, 그날이 생각나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개인정보가 도용되고, 내 명의로 휴대폰이 개통되었다. 자, 이제 경찰서에 가자.

경찰은 개인정보 간수를 잘하지 못한 나에게 먼저 책임을 묻고, 피해를 볼 때까지(어떠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아 원래 이런 건가? 그래, 그러자. 아직 아무런 피해가 없으니깐. 그리고 개인정보 도용으로 인해 지갑에 있었던 운전면허증과 카드를 재발급받고, 개통된 휴대폰을 취소시키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제 나을 수 있겠지.


급한 마음에 길가에서 바로 통신사에 전화를 건다. 아직 2주가 되지 않아, 다행히 개통 취소가 된다고 했다. 통신사는 개통을 시킨 곳으로 연결해주었고, 나는 사정을 말하고 개통 취소를 신청했다. 그런데 이 사장님, 역시 정이 넘치는 한국인인가. 교통사고가 나면 주변 차들이 클락슨을 울리며, 사고가 난 차주를 향해 보험을 부르라고 외친다더니. 나에게 소액결제 내역을 확인해 보았냐고 묻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는 당장 다시 통신사로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본다. 아아 이럴 수가. 구글 플레이를 통한 리니지 게임 11만 원 x 3회 33만 원과 피망 게임 5만 원 x 6회 30만 원 총 63만 원의 결제가 이루어진 상태. 온몸이 떨린다. 바닥에 주저앉고, 아니 눕고 싶다. 소액 결제라니. 63만 원이라니. 리니지라니. 피망이라니! 이러면 내가 당신한테 어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작위적인 스토리를 대입할 수도 없잖아. 안타까운 연출을 할 수도 없잖아. 내가 당신을 딱하게 바라볼 수도 없잖아! 즉 내가 당신을 눈감고 봐줄 수가 없잖아!

다시 걸음을 유턴해 경찰서로 간다. 울그락 불그락한 내 표정을 본 경찰 아저씨. A4용지와 펜을 챙겨 내가 수사 전 해야 할 일들을 꼼꼼하게 적어 주신다. 첫째, 통신사와 각 게임사에 연락해 소액결제내역을 받는다. 둘째, 소액결제 중재 센터에 연락해 중재 신청을 받는다. 다음 세 번째로 수사에 들어간다. 네 번째, 사실관계 확인서가 나오면 각 게임사에 전달해 환불을 의뢰한다.


내 인생에 보이스피싱이라니.

모르는 번호, 지역 번호로 시작된 번호는 받지 말자.

인생은 정말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남에게 해를 입히며,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


자, 수사를 향해, 환불을 향해, 난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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