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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갱 Nov 04. 2019

엄마의 세계

 엄마는 간호조무사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간호사라고 말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엄마가 간호사라고 꽤 오랫동안 믿었다. 엄마가 자신을 간호사라고 말했고 병원으로 출근하니 그 때 나와 동생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시절, 정확히는 국민학교 시절 부모의 직업을 쓰는 종이에는 항상 '간호조무사' 라고 정확히 명시 했지만 그 때 우린 간호조무사가 간호사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학창시절 공부를 꽤 잘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갈 때 마다 엄마가 전주의 여고에서 전교 10등안에 드는 수재였다고 항상 자랑했다. 똑똑한 엄마는 전북대 간호학과에 입학했고 간호사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공부를 잘했던 두 오빠와 남동생에 밀려 대학교 진학이 어려웠고 간호학원을 통해 간호조무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어디 여자가 대학을 가, 그럼 소는 누가 키울거야' 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었고 가난한 엄마는 힘이 없었다.


 그 결과, 엄마는 간호학원을 나온 간호조무사였지만 국립대를 나온 간호사의 세계에 살았다.


 아빠는 술을 먹고 들어오면 엄마와 자주 싸웠다. 언쟁이 높아지면 보통 엄마를 때렸다. 엄마는 항상 폭력의 징조가 보이기 직전에 나와 동생에게 천원짜리 몇장을 쥐어주고 잠깐 나갔다 오라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이야기 해야 하니까 한 시간 정도만 나갔다 올 수 있겠냐고 친절하게 말했다. 엄마의 다정한 말에 폭력의 징조는 없었지만 놀이터에서 하릴없이 그네를 타고 온 나와 동생은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그 정도는 감으로 알 수 있었고 엄마의 팔과 얼굴에 난 생채기와 푸른 멍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나는 모른척 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면 엄마가 슬퍼할 거 같았다.


 엄마는 천원짜리 몇 장으로 나의 동생의 평화를 샀다. 엄마는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의 세계에 살았다.


 바람이 쌀쌀해 지던 어느 가을에 엄마는 복통을 호소했고 병원 검사 결과, 췌장에 종양이 의심된다고 했다. 정확히 확정받으려면 몇 번의 검사가 더 필요했지만 엄마는 '의심'만으로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췌장암을 치료하는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고 엄마는 가난의 무게에 눌려 겁 먹고 모든 걸 포기해버렸다. 그 때는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선택은 합리적인 옵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알리지 말라고 했나보다. 빈소는 어린 동생과 사춘기의 나, 아빠 셋이 지켰다. 그 때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땐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지 나도 이해가 안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짐들을 정리하다 어린 시절부터 쓴 두꺼운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에 서울살이의 고달픔, 외로움, 좋은 남자를 만났다는 설레임, 행복한 가정에 대한 꿈, 전주에 있는 엄마, 아빠가 보고싶다는 이야기들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써 담았다. 우리에게 지워진, 그 누구에게도 지워진 젊은 날 엄마의 꿈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엄마의 견고한 세계는 일기장안에 있었다. 거기에 꼭꼭 잘 숨겨놓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조금 울었다.


 엄마는 그럴 수 있었다. 염색체 하나가 바뀌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그토록 원하던 4년제 대학에 가서 캠퍼스의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 혹은 부자 부모를 만나 셋째 딸이지만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똑똑한 엄마는 좋은 커리어를 쌓아 능력을 인정 받고 좋은 남자를 만나 폭력이 없는 세상에서 알콩달콩 살 수도 있었다. 알뜰하게 모아놓은 돈과 하나쯤 들어놓은 암보험으로 췌장암 따위 거뜬하게 이겨낼 수도 있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에는 모든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엄마의 인생은 꼬일대로 꼬여버렸다.


  

 엄마는 4년제 대학을 나와 간호사가 되었고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화목한 가족을 이뤄 행복하게 살았다.

 엄마의 꼬인 인생은 그쯤으로 추모하는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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