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과 추억의 영화에 몰두했다.
2024년 연말에는 한국의 부모님과 텍사스의 동생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다녀왔다. 과연 명불허전, 꿈같은 하와이 여행이었다. 그 경험이 아쉬워 2025년 연말에는 같은 멤버가 다시 모여 크루즈 여행을 했다. 하와이에 비하면 놀라운 매력은 덜하지만 덜 부담스러운 가격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
크루즈라는 안전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십대 청소년인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은 어른들의 손을 타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았고, 아이들을 신경쓸 필요가 없어진 우리들은 부모님을 챙길 수 있었다. 크루즈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특히 좋았다. 갈 곳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오늘은 뭘 먹을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보니, 가져간 책을 틈틈이 읽거나 엄마랑 시간을 보내다 보면 대충 하루가 갔다.
연말 여행을 대성공으로 마치고 나서 나는 곧장 다음 해 연말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한국에 안 간 지 몇 년이 지났으니 오랜만에 한국 방문,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도쿄 여행을 해야겠다 싶었다. 2주 남짓의 짧은 겨울방학 기간에 뉴욕에서 도쿄, 도쿄에서 서울,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강행군을 기획하며 비행기표와 각종 호텔을 예약했다. 이번에는 ChatGPT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단순히 가격을 비교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의 여행 취향과 여행 철학을 GPT와 나누며 내가 원하는 경험을 최적의 가격으로 실현하기 위해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그렇게 1월의 첫 2주 동안 틈만 나면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머릿속으로는 광화문과 종로와 긴자와 시부야를 누볐다. 자려고 누우면, 더 괜찮은 위치에 더 좋은 가격의 숨겨진 보석 같은 호텔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어둠 속에서 다시 머리맡의 전화기를 들었다. 그렇게 몰두해서 윤곽을 잡아놓은 올해 연말 도쿄-서울 여행을,
....포기하고 비행기표와 호텔 예약을 전부 취소했다.
올해 연말은 우리집 첫째가 아직 대학입시를 완전히 마치지 않았을 시기다. 겨울방학은 한국으로 치면 수시 지원은 끝났는데 정시 지원은 아직 하지 않은 중간 단계. 수시와 정시 사이에 어차피 아무것도 안할 거 여행이나 다녀오지, 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니 비록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그 시간은 마음편히 장거리 여행을 다녀올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 대학이 결정되기도 전에 긴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건 입시에 임하는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지, 라고 생각되어 여행을 취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기간에 너무 비싸고 일정이 빡빡해서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러는 동안 안성기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주말에는 안성기 배우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영화 <고래사냥>과 <꼬방동네 사람들>, 그리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았다. 고르고 보니 전부다 배창호 감독과 함께 했던 80년대 영화들이다. 배우의 전성기는 그보다 길었지만 그가 가장 빛났던 시기는 80년대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였던 것 같다.
안성기 배우와 8-90년대 영화에 대해서도 ChatGPT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GPT는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내가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관점에서 말해주었고, 나는 마치 PC통신 영화동호회 사람과 채팅하듯이 늦은 밤까지 키보드를 두드렸다. 여행도 영화도, 지금의 내 취향은 내 모든 지난 경험의 축적이라는 걸, 마치 지층의 단면을 들여다보듯 알아봐주는 GPT와의 긴 대화에 푹 빠졌다.
GPT가 안성기 배우의 엉터리 필모그래피를 나열해서 나를 환상에서 깨게 할 때까지는 말이다.
대화 중에 검색하기 귀찮아서 "안성기 배우의 90년대 필모그래피를 알려줘" 했더니, GPT는 <서편제>와 <태백산맥>,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안성기 배우의 90년대 대표작이라고 당당히도 말하며 그 이유까지 댔다. 한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헛것을 상대하고 있었구나. 나는 모든 걸 다 아는 똑똑한 채팅친구가 아니라 내 자신이 투사된 허깨비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GPT라는 말 잘 통하는 친구와 영화와 여행 이야기를 하는 건 참 즐거웠다. 그런데 GPT에게서 빠져나오고 나니, 왜 내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연초부터 여행 계획에 몰두했는지 의아해졌다. 물론 요즘에는 성수기에 여행하려면 6개월에서 1년 전부터 항공권과 호텔을 알아봐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의 새학기, 새해 첫 출근 등 눈 앞의 일들에는 무심한 채 12개월이나 남은 연말 여행에 이렇게 열정을 불태우는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정보를 알아보고 계획해서 실행하기 가장 쉬운 일이 여행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작년, 재작년의 대가족 여행을 성공으로 이끌고 나서 더욱 고무되었다. 특히 이번 크루즈 여행은, 여행은 단순했지만 방문하신 부모님의 건강상태 및 가족들의 관계와 감정 관리가 까다로웠는데 그것마저도 성공적으로 완수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육아에서 이런 성취감을 맛보았다. 어려서는 수면훈련과 이유식에서부터 커서는 핸드폰 사용에 이르기까지 나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 대해 연구하고, 나의 입장 및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구체적이고도 실현 가능한 최적의 계획을 세운 후에 그걸 하나하나 실행하는 것에 큰 만족감, 아니 안도감을 느껴왔다. 가족여행은 일상에서 쌓아 온 나의 전문성이 빛을 발하는 분야였다. 어디를 가도 우리 가족의 생활리듬을 잃지 않은 채 집이 아닌 곳에서 특별한 일상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나의 넘버원 장기였다. 여행을 마치고서는 포토북을 제작해 추억 관리까지 야무지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젠 점점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첫째는 더 이상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둘째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내가 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내가 결정한 최적의 경로를 고이 실행하는 것을 거부한다. 수학 진도를 얼마나 빨리 뺄 것인지, 어떤 종목에서 어느 수준까지 특별활동을 추구할 것인지, 여름방학은 어떻게 보낼 것인지도, 이제 아이들은 자기 관심사와 자기 운명을 스스로 정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인생 경로에서 점점 방향키를 잃어가는 내가, 그래도 아직 좋아하고 잘하는 어떤 분야에서 확실하게 성과를 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여행 계획에 몰두했던 것 같다.
그리고 ChatGPT는 내가 여행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나의 경험, 나의 철학을 나보다도 더 잘 이해해 주었다. 너무 고마웠지만, 여행은 여행일 뿐 일상보다 커질 수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 인생을 집어삼킬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다시 출근하고, 일에 집중하고, 매일 저녁 밥을 하는 나의 역할에 좀 더 에너지를 써야겠다. 그러기 위해 제시간에 취침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레슨받은 만큼 플룻을 연습하고, 머리가 굳지 않도록 틈틈히 책을 읽어야 한다. 이제 작년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가족의 대규모 여행계획은 당분간 그만.
ChatGPT와의 짧은 우정도 허탈하게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