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와 <파반느>, 그리고 임현정 가수
사랑영화다운 사랑영화를 본 게 과연 얼마만인가. 나를 마지막으로 울렸던 사랑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었다. 그 후로도 여러 사랑영화를 더 봤겠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마음에 남지 않았고,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사랑영화는 결국 젊은이들을 위한 영화다. 슬픈 영화를 보고 울지 않으면서 나는 더 이상 젊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나를 울리고 메마른 마음을 먹먹하게 해줄 슬픈 사랑영화를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2026년 2월, 선물처럼 미국에 도착해 개봉 첫 주말 달려가서 본 <만약에 우리>.
사랑에 빠진 젊은 날의 반짝임, 현실에 지쳐 못난 마음으로 뾰족하게 연인을 밀어내는 것, 그리하여 아프게 떼어내버린 인연, 먼 훗날 다시 만나 정식으로 안녕하며 이별하기까지... 영화는 "너무" 예쁘고 깔끔했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었다. 대신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내가 계속 생각한 사람은 은호도 정원이도 아닌 임현정 가수였다.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인 노래는 그의 2003년 히트곡인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이었지만 나는 그보다 오래된 노래인 <첫사랑>을 계속 생각했다. 한 시대를 떠올리게 했지만 또 그 시절과 함께 잊혀진 노래. 가수의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본 적이 없다.
그의 근황과 음반 목록을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임현정 가수는 대부분의 노래를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 그리고 키가 크고 세련된 미인이다. 도대체 왜 이런 분이 스타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2006년에 발표한 5집 이후 긴 공백을 가졌다가 2018년에 컴백했다고 한다.
가수의 5집 전곡은 7년 전 날짜로 유튜브에 모두 올라와 있고 나는 요즘 출근길에 그의 노래를 듣는다. 2006년에 세상에 나와 곧 잊혀졌다가 2018년 인터넷에 올라온 노래들이 2026년에야 나에게 와 닿았다는 게 신기하다. 그렇게 나는 옷장 속에서 찾아낸 오래된 비단옷처럼 화려한 임현정 가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20년 전 노래가 지금 나를 찾아와 마음을 휘감고 다시 시간을 초월해 떠나간다.
바람아 불어라, 나를 데려가거라
되돌리고 싶은 그때로 날 데려가거라
(중략)
시간아 멈춰라, 나를 꿈꾸게 하라
다시 올 수 없는 그때를 꿈꾸게 하여라
임현정 5집, <Cherry Tree>
<만약에 우리>를 영화관에서 본 지 2주일만에 넷플릭스에는 영화 <파반느>가 공개되었다. 아무 소식을 못 들었던 터라 파반느라는 제목을 보고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임이 틀림없다. 파반느 또한 15년의 세월을 거슬러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파반느>도 예쁘고 깔끔했다. 이제는 오래되어 낡은 데다가 이미 당대에도 불친절했던 원작을 이해하기 쉽게 영상으로 잘 구현했다. 죽은 원작을 시대에 맞게 되살렸다고 생각한다. 경록과 미정이 LP샵의 감상실에서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는 <비포 선라이즈>가 생각났고, 경록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전봇대 앞에 꺾어져 우는 장면에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파반느>를 보고 눈물 흘리는 젊은이들은 아마 그 영화들을 모를 것이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서 마음 속에 어둠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은 사랑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게 빛을 밝혀준다. 영원하지 못했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한 뼘 더 성장하여 세상 밖으로 나왔고, 돌아보니 그 시절이 영원한 청춘이었다. 역시나 나는 더 이상 이런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
대신 책꽂이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박민규 작가의 2009년 원작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꺼내 다시 읽었다. 파반느는 그때도, 소재가 신선하고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외모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짓눌린 절망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400페이지 넘도록 내내 그 절망에 짓눌려 있을 수 없어서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철 지난 장편소설을 이제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달콤한 그리움 뿐.
그런 식으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머물 수 없음을, 하여 인생은 흐르는 강과 같다는 사실을 그 무렵의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36 페이지
아득히 이제는 흘러가버린 그 순간과, 그곳에 잠시 함께 머물렀던 <우리>를 잊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그곳이 나의 딸기밭이었고, 스무 살의 우리는 단지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38 페이지
나는 이제 사랑영화에 울지 못하는 중년이 되었다. 더 이상 구슬 같은 처녀가 아닌 것처럼. 그래도 아직은 좋은 사랑영화가 나왔다고 하면 찾아보고 있다. 이 순간도 흘러간다. 지금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지금을 추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지.
임현정 가수는 2025년에 6집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나처럼 마음이 늙지 않았을까? 아직도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다음 주부터는 출근길에 그의 6집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