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스키장은 가까운 스키장
싱가폴에서 돌아와 3년 만에 맞이하는 뉴저지의 겨울. 크리스마스 방학 때 버몬트의 스키장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사흘간 스키강습을 시켰다. 아이들이 꽤 좋아했어서, 버몬트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기회가 닿는 대로 몇 번 더 동네 스키장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올 겨울 뉴저지에는 통 눈이 안 왔다.
눈을 기다리다가 1월이 갔다. 2월에는 1주일 겨울방학이 있었는데 나랑 아이들은 동생이 살고 있는 텍사스에 다녀왔고 남편은 3주간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어어~ 하다가 1월 2월이 다 지나버렸다.
뉴저지는 겨울의 꼬리가 길다. 겨울 한파가 지난 것 같아도 2월에 크게 한 번 눈이 오고, 잊을 만 하면 3월에도 다시 크게 눈이 오고, 진짜 이젠 아니겠지 하다가 4월 초에도 한 번 더 눈이 오곤 한다. 그래서 스키의 꿈을 아직 버리지 않았는데, 올해는 정말로 눈이 안 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눈이 오는 토요일에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온 가족이 곧장 스키장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토요일에 한 번도 눈이 안 왔다.
그래서 혹시 눈이 오는 날에는, 평일이라도 학교를 빠지고 둘째만 데리고 스키장으로 출동하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는 이미 3월이었다.
첫째는 중학생이라서 학교를 빠지고 놀러가기가 더 어렵기도 했지만, 둘째만 데리고 스키장에 가고 싶은 이유가 있다. 이 아이는 누나보다 덜 태평하고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자기의 규칙이나 계획이 어그러지면 좌절과 짜증을 잘 참지 못한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자연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이 사소하게 여겨지는 가슴 탁 트이는 경험을 좀 더 많이 시켜주고 싶었다. 그런 아이가 마침 "올 겨울에 한 번만 더 스키장에 가고 싶어요" 라고 졸라대니, "그래, 그럼 눈이 오는 날에는 무조건 학교를 빠지고 스키장에 가자!"하고 우리 딴에는 과감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번주 화요일에 눈이 왔다. 3월 중순의 봄눈이니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눈일 것이다.
주말에 미리 눈 예보를 보고 가족들에게 계획을 얘기했더니 스키를 타지 않는 남편도 기족 행사에 함께하고 싶으니 운전을 하겠다 나섰고, 첫째는 자기도 스키타러 가고 싶은데 다만 조르지 않았을 뿐이라며 아쉬워했다. 둘이서 단촐하게 갔어야 하는데, 이렇게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가뿐하게 학교 빠지고 직장 빠지고 다녀오기 어렵다.
그래서 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계획을 세웠다. 눈이 오고 난 이번주 금요일을 거사날로 한다. 남편은 회사를 하루 빠지고 아이들은 오후 1시에 학교에서 일찍 하교시켜 곧장 스키장으로 출동이다. 스키장은 한 시간 거리고 오후 3시부터 시작하는 반일권을 끊는다. 이 날을 놓친다면 올해는 더 이상 스키가 없을 것이다.
화요일 하루 눈발이 날리더니 수요일, 목요일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았다. 최저기온은 이미 영상, 최고기온은 10도 이상으로 올라갔다. 스키장에 눈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인공눈을 만들었대도 이렇게 따뜻한 날씨에 그 눈이 남아날 재간이 있을까. 스키를 못 타는 것보다도 둘째가 실망할 것이 걱정됐다. 학교를 조퇴하고 한 시간을 달려갔는데 누런 민둥산만 남아 있으면 어떡하나.
어떻게 아이를 달래나. 더 기다리지 말고 화요일에 갔어야 했는데, 왜 기다렸을까? 왜 원래 계획대로 하지 않고 한 번 더 계획을 바꿨을까?
목요일 오후에 학교가 끝난 아이를 픽업하는데, 날이 너무 더워서 나도 재킷을 입지 않고 운전했고 아이도 재킷을 벗어 든 채로 학교 빌딩에서 나왔다. 과연 다음날 스키를 탈 수 있을지 조마조마해서 아이에게 운을 띄웠다. 나쁜 소식은 먼저 전해야 하는 법이다.
"오늘 날씨 너무 좋지? 내일은 더 좋대."
"좋다는 게 무슨 말이야? 스키타기 좋다고?"
"아니, 내일은 더 따뜻해서 스키타는 데는 더 나쁠 거야."
"어쩔 수 없지, 스키는 내년에도 탈 수 있으니까."
뭐라고......??? 이게 우리 둘째의 반응이란 말인가? 마음의 부담이 봄눈 녹듯 녹았다. 자연 속에서 가슴이 탁 트이는 경험을 하면서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마음이, 자연 속에 가기 전에도 이미 있구나.
"그리고 엄마, 혹시 내일 스키를 못 타면 우리 백업 플랜은 뭐지?"
아...... 나는 이제 스키장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 스키를 타는 즐거움은 그저 덤이다. 이 아이가 어느 새 좀 더 긴 시간관념을 갖고 조금 더 긍정적이 되었구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얼른 대안을 찾기 시작하는구나. 이젠 스키장에 눈이 다 녹아도 괜찮다.
우리는 계획대로 스키장에 갔다. 다행히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 제대로 운영하는 리프트는 딱 두 개. 그 중 하나는 초보자용 매직카펫이었으니 실제로는 리프트가 하나였다. 직원들도 얼른 문 닫고 집에 가고 싶은지, 다들 전화기만 들여다보면서 리프트 티켓도 거의 확인하지 않았다. 이번 주말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끝낸다고 한다.
눈의 질은 엉망진창. 슬로프의 중간중간 흙이 보이고, 잔돌이 튀어나와 있기까지 했다. 리프트 주위는 아예 흙탕물이 철벙철벙. 그렇지만 스키를 탈 수는 있었다. 어차피 부족한 우리 실력에, 경험 없는 우리의 허술한 눈높이에 이 정도면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겨울 내내 페이스북에서 보던 콜로라도, 홋카이도, 알프스의 스키장이 부럽지 않았다. 집에서 얼른 달려와 올해의 마지막 스키를 탈 수 있었으니. 다음 겨울에 다시 스키타러 갈 날을 기대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스키 실력도, 그리고 마음도 훌쩍 자란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