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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돼지 Dec 05. 2019

엄마와 나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

나는 약은 사람이다. 학원이 다니기 싫으면 선생님의 교육 방식이 맞지 않는다는 그럴 싸한 이유로 엄마를 설득해 학원을 그만뒀다. 성인이 되어서는 단체에 속하게 되면, 사람들과 친분을 쌓은 후,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험담으로 여론을 만들고 모두를 내편으로 만들었다. 생각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게든 정보와 소문들이 나에게로 왔다.



대학생 때, 영국에서 일을 하며 다른 스태프들과 기숙사 생활을 할 때었다. 브라질에서 온 친구가 급하게 나에게 와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 여자 친구가 있는 J군의 방에 다른 한국인 K양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브라질 친구도 보고 말았으면 됐을 텐데, 성격이 대차서 굳이 그 방 문 앞에 몇 분을 앉아있다가 J군의 방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J군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방의 불은 껴져 있었고, 브라질 친구가 K양을 찾으니 J군은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한다. 브라질 친구가 다 보았다고 하니, J군 뒤로 껌껌한 방에서 K양이 나왔다는 것이다. J군과 K양의 사이가 평소에도 너무 좋아서 다들 농담으로 J군이 바람피우는 것 아니냐고 하긴 하였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사건이었다. 나는 바로 이 이야기를 다른 스태프들에게 전했고 그 이후로 둘의 불륜에 대한 말들이 많이 오고 갔다.


작년에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하우스셰어를 하던 때였다. 내 방 바로 앞에 살던 리투아니아 출신 친구 S양은 일본에서 유학을 했으며, 일본과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아시안 남자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털털한 성격에 나이도 나와 비슷해서 우리는 친해졌다. S양은 일주일에 5일은 헬스장에 가고, 건강식으로만 적은 양을 먹으며, 몸매 관리에 힘썼고 외모도 특출 나 남자들이 좋아했다. 나는 가서 운동만 하는 헬스장에서 남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데이트까지 하는 인기 많은 여자였다. 같은 하우스에 사는 남자들도 더러 S양에게 구애를 하였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같이 사는 폴란드 출신 M군이 저녁을 하는 나에게 와서 오늘 아침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30대 중반에 머리가 많이 벗겨졌으나 몸은 나름 근육질의 M군은 말이 많은 타입으로, 퇴근 시간이 나와 비슷해서 저녁을 라운지에서 함께 먹는 경우가 많아 이런저런 수다를 몇 시간이고 떨었기 때문에 나름 나와 친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아침에 라운지에서 M군과 S양이 아침을 각자 먹고 있었다. S양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 주 주말 계획을 물었는데 S양이 계획이 없었다고 했고, M군이 자기도 계획이 없으니 함께 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S양은 갑자기 주말에 계획이 생겼다며 거절을 했다. M군은 자신은 데이트하자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친구로서 어울려(Hangout) 놀자는 거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을 바꾸냐면서 분개했다. 앞으로 S양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평소에 M군과 이야기를 하면 여자를 만나고 싶으나 자존감은 낮아서 용기가 없고, 매력 또한 없어서 여자를 못 만나는 상황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M군이 데이트 신청을 하였으나 S양에게 까여서 미약한 근거로 S양을 욕하는구나 싶었다. S양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의도가 아니라 진짜 다른 계획이 있었을 거라며 S양에 대한 변호를 해주었다.


이틀 후, 라운지에서 S양을 만났고 S양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버전으로 해주었다. M군이 어제오늘 자기에게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자신의 말도 무시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아침에 M군이 주말에 계획이 있었는지 물었는데 계획이 있는 것을 잊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말을 했다가, M군이 자기와 같이 어울리자고 제안을 했고, 그때 본인이 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 기억나서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나를 보더니 S양은 왜 놀라지 않냐면서 M군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었다. 눈치가 참 빨랐다. S양 역시 M군이 자신을 과하게 무시하는 것을 보니 친구로서 같이 놀자고 제안한 것은 아닌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드라마 생중계가 따로 없었다.


영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회사와 엄마한테 말할 명분이 필요했다. 내 약음을 발휘해야 했다. 물론 나에게는 명분이 있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도 납득할 만한 명분이어야 내가 가는 길에 편할 것 같았다. 내가 가진 명분은 이랬다.


3년을 넘게 같은 회사에서 일했음에도 나는 여직원으로 불렸다. 업무에 있어서 남직원들이 하는 업무와는 별개로 작은 뒤치다꺼리부터 단순 서류 작업까지 자잘한 일을 해야만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소기업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중견기업인 거래처에서도 관리직의 여자 직원을 볼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정년까지 다닌다 해도 20년 후에 나는 '그 회사 여직원'일 것이 분명했다.

거래처 남자들이 가끔 칭찬이랍시고 나의 외모나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평가를 할 때, 나는 또 한 번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했다.

영국에서 오래전에 1년을 지내기는 했지만, 술 먹고 놀 때 말고도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영어를 더 잘하고 싶었다.

나름 따지고 따져서 만난 전 남자 친구가 성에 안 차 이별을 고한 후, 대한민국 땅에는 나에게 맞는 남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미혼으로 살아갈지, 더 넓은 영국으로 가서 남자를 한번 꼬셔볼지 선택의 갈림에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서 '메갈리안'이라는 페미니즘 사이트가 등장했고, 한국에서는 여자들의 삶이 힘드니 외국으로 나가라는 글을 보았다. 공무원도 대기업 직원도 아니었던 나는 외국이 나에게 더 열린 문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개인적인 명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밀 수는 없었다. 회사에는 근래 내가 맡은 업무가 적성에 안 맞고, 이제 서른이 다 되는 나이라 지금 아니면 해외 경험을 다시 못할 거 같아서 퇴사를 하고 영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나의 용기에 박수를 쳐주었다.

엄마에게 말을 하는 것이 사실 더 어렵고 주저스러웠다. 엄마는 교사로 정년퇴직을 해 학교 밖의 세상은 잘 모르는 보수적이고 교과서적인 사람이다. 삼 남매 중에서 내가 엄마 뜻을 항상 크게 거슬렀고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내가 서른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우리는 갈등이 있었다. 엄마는 백 프로 나의 의견에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의 반대가 익숙한 나로서는 엄마를 이길 무언가 혹은 엄마를 이해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핑계가 영어였다. 엄마에게 업무를 하는데 영어가 부족해서 힘들다고 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업무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에 있을 때도 어학연수를 했던 것이 아니라 일을 했어서 이번에는 가서 어학연수도 하고 좀 더 영어를 잘해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한국에 있으면서 남자 만나고 결혼하지 왜 굳이 멀리 가느냐고 반대를 하면서도, 내가 영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에 반대하지는 못했다. 엄마도 주변 사람들처럼 자식들 유학시키고 서포트해주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아빠가 사업한답시고, 집과 많은 돈을 날리는 바람에 자식들에게 서포트를 못해준 게 항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나는 삼 남매 중에서 커리어적으로는 제일 안 된 케이스라서 엄마는 나에게 제일 미안하고 속상하다고 했다. 엄마는 딸이 부족한 영어를 늘리겠다고, 서른에 해외로 간다는 게 속상했고, 나는 엄마가 속상해하는 게 미안해서 우리는 그날 같이 울었다.


엄마는 거실에서 이모들과 몇 시간이고 전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 방에서 본의 아니게 그 내용을 들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이모와 전화하면서 SKY 대학에 간 남동생의 IQ와 나의 IQ가 똑같게 나왔었단 이야기를 했다. 나도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좋은 대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식의 이야기였다.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내 머리가 좋단 생각은 안 했었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별 생각이 없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수학과 과학 성적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과학 성적이 1학기 2학기 중간 기말 모두 통틀어 90점대 이상으로 가장 낮은 점수가 92점, 가장 높은 점수는 97점이었다. 1학년 학기가 다 끝나고 겨울 방학이 들어가기 전에 과학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나를 교실 앞으로 따로 불렀다. 연세대학교에서 하는 과학영재교육이 있는데, 네가 가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내 기억으로는 한 반에서 두 명이 추천받아서 가는 교육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런 걸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안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설득을 했고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내가 영재 교육을 받을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알았다며 다른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에게 제안했고 그 친구가 그 교육을 받으러 간 것 같았다.


내가 영재가 아닌 건 맞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건대, 그때 내가 과연 그 교육을 받으러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에 더 흥미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이런 대학에서 꼭 공부하고 싶다고 공부를 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평소에 엄마가 나에게 혼내거나 꾸짖는 말 대신 칭찬이나 자신감을 주는 말을 해줬다면, 그래서 내가 나도 영재교육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인지해서 그 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교육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몰라도 내가 가장 미안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내 자신을 평가 절하했었다는 게 나에게 제일 미안하다. 이 이야기는 혹시 엄마한테 말하게 되면 엄마 기분이 좋지 않을까 봐 앞으로도 말할 생각은 없다.


이전 글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절친이 중학생 때, 내가 집에서 차별을 받아서 나에게 내가 소설 '홍당무'에서 홍당무 같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최근에 내가 그 친구에게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을 이해한다고 하자, 나에게 착하다고 했다. 세세하게 기억을 하려면 잘 기억도 안 나고, 그냥 내가 삼 남매 중에서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제일 못 받았다고 생각한 게 다다. 맞을 짓을 하면 빗자루든 파리채로든 맞았고, 손을 들고 벌을 섰다. 나는 학원을 빠지고, 학원비를 삥땅 치고, 가출을 했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아빠는 자식에 관심이 없었으며, 엄마는 집에 오후 6시가 되어야 왔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등하교를 했고, 집에 오면 어른이 없었다. 방과 후에 학원을 안 가든, 가출을 하든 엄마가 올 때까지는 내 마음대로였다.


당시에 나는 나를 혹독하게 훈육한 엄마를 싫어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아빠와 한국사회를 더 증오한다. 엄마는 한국사회에서 육아와 일을 모두 해야 하는 평범함 여자였을 뿐이다. 엄마도 사회의 피해자였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에도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이혼을 할 수 없었던 여자. 놀랍게도 버전은 다르지만 이런 식으로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자식들을 위해서,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이혼을 못하고, 반대급부로 나름의 마이너스한 에너지를 뿜은 어머니들이 많다. 엄마한테서는 내가 어떻게 이 결혼을 유지하면서 너한테 옷을 사입히고 밥을 해서 먹이는데, 공부를 안 하고 학원을 땡땡이치냐는 식의 화를 나에게 표출했을 것이다. 나는 분명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맞을 짓을 많이 했다고도 생각 안 한다. 그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살기 위한 두 여자의 발악이 아니었을까.


내가 아들이어서 부모님으로부터 더 사랑을 받았다면, 내가 그렇게 엇나갔을까. 남동생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책상에 앉아 스트레스로 자신을 머리털을 뽑으며 책상에 그 머리털에 수북하게 쌓일 때까지 공부를 했다.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 엄마는 남동생의 고등학교에 수도 없이 찾아갔고 남동생 친구들을 알고, 그 친구들의 엄마들도 안다. 엄마는 나의 고등학교 생활 3년동안 고3 때 학부모 상담으로 한번 학교엘 왔다. (아빠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한 번 와준 엄마가 낫다.) 남동생은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는다고 폴로와 같은 브랜드 옷을 사줬다. 남동생과 나는 5살 차이가 나서 시대가 달랐는지는 몰라도 나는 시장표 옷을 입었다. 엄마는 내가 뚱뚱해서 맞는 사이즈 옷이 없다고 했다. 남동생은 항상 엄마 말을 잘 듣고, 잘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술 마시고 늦게 오는 날에는 엄마에게 미리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자라서 밤 12시에는 들어와야 하니까 엄마가 안 된다고 할 걸 알아서, 그냥 말을 안 하고 새벽까지 다가 엄마 전화를 안 받았다. 애초에 내가 밤늦게까지 놀기 시작한 것도 남동생이 대학을 가고 나서부터다. 대학교 는 밤 12시, 통금 전에 집에 왔는데 남동생이 대학에 가고 집에 늦게 오는 걸 보고 나도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근데 나는 안 되는 거였다.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집에 늦게 온다고 엄마랑 소리를 지르고 싸웠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엄마를 많이 원망해야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남동생은 원체 바르고 나는 원체 나쁠 수도 있다. 혹시 내게 엄마를 원망해도 되는 자격이 있다해도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이해한다. 나도 1957년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그랬을 거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다. 엄마는 자식을 한다. 내가 원망하는 건 아빠와 한국 사회다.

나는 웃음소리가 크고 코로 '킁킁'하며 웃는다. 엄마는 농담으로 바보 같다고 그렇게 웃지 말라했다. 언니는 내 웃음소리에 깜짝 놀랐다고 나를 살짝 때렸다. 지금 남자 친구는 내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한다. 내가 웃는 게 좋다고 나를 웃기려고 여념이 없다. 가족이 그립기는 하지만 우리가 멀리 있어서 애특한 것이 더 좋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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