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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위한 자식의 희생, 엄친아 가면 쓰고 연기하기

가족은 반드시 화목해야 하나?

by 홍주현

유학생 A는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인공사진 화면으로 비행기가 대한민국 근처에 다다르는 모습을 확인하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그 두근거림이 갑자기 꽉 막힌 답답함으로 변해 질식할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 깜짝 놀란 승무원이 안부를 물었을 때는 호흡 곤란이 나아지긴 했지만, 몸이 뻣뻣한 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응급실에 도착할 때 즈음엔 그 증상이 모두 사라졌다.


A는 조기 유학에 성공한 인재다. 미국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 한 뒤 대학까지 진학해 홀로 학창시절을 잘 보내고,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긴 상황이었다. 방학을 맞아 몇 년 만에 가족이 있는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근 오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병원 응급실에서 본 부모는 혼비백산했다. 부모와 만났을 때 A에게는 이미 이상 증상이 다 사라졌지만, 부모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을 붙잡았다. A는 다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지만, 이내 자신을 다그쳤다.

‘부모님과 함께 있는 자리야.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그러곤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별 일 아니에요. 기내식을 먹은 게 체했었나 봐요. 걱정 마세요.”


가족은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부모님 앞이니 몸 상태를 숨기고 멀쩡하게 보이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라고 기합을 넣다니. A는 왜 그러는 걸까?


내가 A를 만난 건 직장에서였다. 그는 방학 동안 사무실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했다. A는 한 마디로 엄친아였다. 가정환경이 유복했고, A도 내성적이지만 그래서 조용하고 성실한 딱 바른 생활 청년처럼 보였다. 시키는 일도 즉각 잘 처리해서 사무실 사람들이 좋아했다. 내가 엄마라면 저런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다소 흠이라면, 때때로 왠지 모르게 그늘진 구석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는 점이다.


응급실 에피소드를 알게 된 건 그와의 이별 회식 때였다. 직원들은 연신 그를 칭찬하며 어떻게 하면 자식을 A처럼 키울 수 있을까, 진담 반 농담 반 이런 시답지 않은 얘기를 했다. 일하면서 함께 지내는 동안 친해서였는지 자기 얘기를 했다. 어릴 때부터 그 부모님은 자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는데 부모님이 그런데는 자기 영향도 큰 것 같다고, 다소 후회스러운 듯 말했다. 피아노, 수영, 미술은 물론이고 플루트, 테니스, 댄스, 심지어 연기까지 쉴 새 없이 뭔가를 배우러 다녔고 어디서든 웬만큼은 하자 부모님이 자기를 크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고 자기도 더 열심히 했더니 자기에 대한 부모님 기대가 점점 더 커진 것 같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나에 대해서 잘 몰라요. 내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거든요. 특히, 미국에 간 이후 엄마 아빠가 아는 나는 거짓이에요. 엄마가 아는 나는 어렵고 힘든 고민 같은 것은 하나 없이 뭐든지 다 잘하는 만능맨, 공부밖에 모르는 착하고 순진한 모범생이거든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사무실에서 우리 눈에 비친 그 모습도 그랬기에 우리는 뜨끔했다. 그는 의외의 모습을 고백했다. 한 때 친구들과 어울려 대마를 피운 적 있고, 지금도 어쩌다 가끔 피운다는 것이다. 여자 친구도 끊임없이 사귀는데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무조건 걸리는 대로 만난다고 했다.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미국 생활은 정말 힘들어요. 처음엔 죽을 것만 같았어요. 인종차별은 당연하고, 내가 있던 곳은 파벌싸움까지 있었어요. 우수한 학생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경쟁도 무척 심하고요. 영어가 서툴고 친구 사귀기도 힘든 처지라서 지독히 외롭고 힘들었어요. 고충을 함께 나눌 사람도, 힘든 얘기를 털어놓을 사람도,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힘든 일을 겪을 때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그냥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무척 큰 힘이 된다. 문제 해결책 따위는 필요 없다. 어떤 사람이 내 토로를 들어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남편과 투병생활을 함께 할 때 나도 여러 가지로 힘들었는데, 그 때 친정이 가까운 덕에 부모와 동생 가족에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절감한다. 대개 유학생은 한국에 있는 가족과 자주 통화하는데 A는 그러지 않았던 걸까?


“일주일에 한 번씩 통화했지만, 엄마가 좋아할 얘기만 골라서 했어요. 학교에서 얼마나 칭찬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요. 그렇게 한참 엄마와 웃고 떠들다가 전화를 끊으면 방으로 뛰어갔어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거든요. 내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베개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어요. 거기서 전화기에 대고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외쳤죠. 엄마, 나 힘들어, 집에 가고 싶어…”


부모에게 속내를 감추고 그 앞에서는 아무 고민도, 문제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자녀가 한국에서는 적지 않다. 어느 소셜 미디어에서 한 청년은 평소 친구들에게는 비밀 없이 솔직한 편이지만, 부모에게는 비밀 가득했다고 고백한다. 나름 부모를 생각해서다. 괜한 걱정을 끼치거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갔다가 꽤 오랫동안 유럽에서 지낸 사실, 여행하느라 동남아에서 지낸 사실, 외국인 남자친구를 사귄 경험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부모에게는 당신들이 수긍할 만한 다른 일을 한다고 말했다. 부모 생각에 힘들 것 같은 일 또는 바람직하지 않은 듯한 일을 하면 전화할 때마다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자기를 설득하려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래도 거짓은 거짓이다. A처럼 그녀 역시 한국을 떠난 후 부모가 아는 자기 인생은 온통 거짓이라며 마음 불편해했다.


남편도 그런 편이다. 부모님에게 속내를 잘 말하지 않고 늘 다 괜찮다, 아무 문제없다고만 말한다. 수술했을 때도 그랬다. 수술 후 퇴원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한동안 우리는 여러 번 응급실로 달려갔다. 수술 실밥이나 피고름 같은 것 때문이지 위급한 문제가 생겨서 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응급실에는 늘 사람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했고, 겨우 침대에 누워 처지를 받아도 의사가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최소 하루 이상 응급실에서 지내야 한다. 별 일 아닌데도 그럴 때마다 부모님에게는 공기 좋은 곳으로 며칠 여행 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늘 나를 나무란다. 나는 부모에게 말해야 한다면 늘 있는 그대로 말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걱정하실 테니 선의의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효자고 철 든 사람이다. 나처럼 솔직하면 불효요, 나이 헛먹은 사람이 된다.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의 사람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다 얘기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 간극이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선의의 거짓말은 못할망정, 혹여 부모의 과분한 걱정과 염려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면 그 즉시 그는 패륜아로 낙인찍힐 테다. 가족이 힘이 돼 주는 게 아니라 속박으로 둔갑할 수밖에 없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는 자식은 점점 부모를 피하게 된다. A도, 워홀을 다니는 소셜 미디어 청년도 가족을 멀리하려고 한다. 남편도 부모 앞에서는 그리 편하게 보이지 않는다. 위태롭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을 뿐 이런 모습을 과연 바람직하며 화목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때 생각이 났는지 A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잠시 뒤 말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엄마를 위해 태어나고, 부모를 위해 사는 것 같아요.”


21세기 최첨단을 달리는 대한민국 청년이라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한국의 근대 지식인 춘원 이광수는 〈자녀중심론〉에서 “조선의 자녀는 오직 부조(부모 및 가문)를 위해서만 살았고 일했고 죽었다”고 한탄한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서 자녀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엔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자기 청춘을 다 보내고, 부모가 죽으면 3년 상을 치러야 하는 등 자녀는 오직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 대가 없는 순수한 희생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 특히 후기로 갈수록 효도는 실제로 적잖은 이익을 안겨줬다. 조선은 나이와 신분 서열로 위계를 세우고, 자기 자신에게서 가까운 것에서 먼 것 순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종횡 세계관으로 사회 질서를 구축했다. 유교적 예법은 그러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식적 수단이었기에 효도는 단순히 키워준 은혜에 대한 감사 표시가 아니라 일종의 제도이기도 했다. 오늘날 효자·효부상은 민간 주최로 부여하며 그 보상도 명예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에서는 국가(임금)가 주는 것으로 그 보상은 조세와 부역 문제 등 상당한 실익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그에 따라 효자 되기 경쟁이 과열되고 그 의미가 왜곡됐지만.


조선이 종횡 세계관의 유교를 사회 질서 수단으로 삼은 건 신분 시대에 맞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조선 사회는 개인이 아무리 큰 뜻을 품고 노력해도 신분에 따른 ‘유리천장’이 앞길을 막고 있는 체제였다. 그런 사회에서 부모는 자식 뒷바라지를 하거나 자식에게 투자할 유인이 없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은 그저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부모 권위에 복종하면서 자기 노고를 덜고 노후에 자신을 봉양할 정도면 만족이다. 아이는 낳기만 하면 알아서 큰다는 흔한 옛말은 생각보다 무책임한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식량이 풍족한 것도, 보건 환경이 좋았던 것도 아닌 상황에서, 태어났는데 혼자 알아서 크지 못하는 아이는 그냥 죽게 내버려뒀을 가능성이 크다. 죽으면 또 낳으면 된다고 여길 만큼 애 낳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식은 부모에게 그렇게 귀중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식에게 부모는 자기 미래 그 자체다. 부모의 신분과 지위는 곧 자기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자기 의지 같은 품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고 할 게 따로 없이 자식으로서 부모를 향한 희생적 효도에 올인하는 게 자기 자신에게도, 부모에게도, 사회적으로도 합당했다.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신분에 따른 ‘유리천장’은 자식보다 부모 가치를 크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부모보다 자식의 가치가 크다. 본인 능력에 따라 성취 가능성이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부모의 것이 내 것이 될 수도 없다. 따라서 부모에게 자녀가 중요해진 만큼 부모는 자녀에게 열과 성의를 다한다. 그리고 자녀 입장에서는 자기 가능성을 여과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자기 의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등 ‘나’가 중요하다. 부모보다 ‘나’를 먼저 위하는 태도가 더 바람직하고 중요한 것이다.


자기 삶, 자기 자신을 잃을 만큼 희생적으로 부모를 위하는 태도는 부모도 결코 바라지 않을 테다. 부모가 아무리 나를 위해도 내가 나를 챙기는 것만 하지 못하다. 자기만족 또는 자기를 잃어가는 것, 그런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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