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풍의 계절>을 보다가
채널을 돌리다가 오래 전 드라마 <폭풍의 계절> 1~2회를 봤다. 고딩 땐지 언젠지 80년대 말 아님 90년대 초에 나온 드라마다. 어린 맘에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였던 걸 상당히 인상 깊게,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다.
1~2회는 최진실이 화자가 되어 자기가 태어나기 전 부모의 상황, 배경 등을 설명하는 나래이션으로 진행된다. 지방 어느 곳에서 시부모 아래에서 다른 여러 가족을 챙기면서 지내는 정숙한 맏며느리 엄마가 서울에서 생활하는 최진실의 삼촌, 즉 엄마의 시동생을 안부겸 만나는 얘기였다. 엄마는 시어머니의 지시로 미혼인 시동생에게 선 자리가 들어왔으니 만나보러 언제 내려오라는 말을 전한다.
그런데, 삼촌에게는 이미 서울에서 데이트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앳된 김성령이 그 여자다. 그녀는 유학을 다녀온 대학교수로 소위 신여성이다. 여성의 사회적 위치, 시선 등에 저항하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오늘날로 치면 페미니스트다. 더욱이 그녀는 유부녀다. 어떻게 결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기 의지가 아닌 부모 결정에 의한 것이었을 테다.
선을 보러 오라는 고향집 어머니의 메세지를 들은 남자가 김성령에게 이참에 함께 내려가서 인사드리자고 제안하면서 얼른 이혼하라고 하자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혼해서 당신과 결혼하더라도 세상이 우리 결혼을 내버려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우리 사이를 파탄낼 거라고. 둘은 부등켜 안고 절규하며 괴로워한다.
그 모습을 보는데 우선, 와닿지 않았다. 오늘날 그런 고민은 너무나 말도 안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도 없는 상태라면 이혼과 재혼은 아무 일도 아니다. 고민해야 할 이슈가 있다면 그건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 사회적 시선 같은 암묵적 구속 때문이 그렇게 큰 비중을 하지는 않는다. 옛날에는 참 별 것 아닌 일을 갖고 쓸데 없이 애를 쓰면서 진을 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사람에게, 특히 여성에게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는 됐다. 당시 사회적 배경과 분위기를 알고 있으니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괴로웠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었다. 감정적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그 장면을 뚫어져라 보고 그 이야기에 계속 흥미를 갖고 귀기울이면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었을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할 수 있었던 건 그 '이해' 덕이었다.
솔직히 드라마의 그 남녀 모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될까. 우리 부모님 세대, 어쩌면 나보다 한 열 살 정도 많은 사람들까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들과 비슷한 감정을 재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만해도 그 장면이 어떤 감정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감정과 고민을 존중할 수 있다. 오히려 공감하지 않고 이해만하는 덕에 더 있는 그대로 그 감정과 고민을 존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감정, 즉 에고적인 어떤 게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은 감정적으로 같은 상태다. 감정에는 물리적 에너지가 있다. 오랫동안 주저하던 일도 감정이 자극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당장 실천하게 된다. 최근의 공감 강조는 투쟁이나 혁명 같은 어떤 실천적인 일들을 하도록 독려하는데 익숙한 세대의 영향이 있는 것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공감을 말하는 게 늘 불편한다. 감정은 온전히 '나'의 영역, 내면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뭔가 선을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느낌이랄까.
서로 같기를 바라지 않으면 좋겠다. 더욱이 감정적으로 같아야만 연대감을 갖거나 유대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참 힘들고 부담스럽다. '나'가 온전히 '나'이기 어렵다. 집단주의, 개인주의 관점에서 보면 '연대'라고 하기도 어렵다. '같음'을 매개로 뭉치는 건 여전히 집단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은 연대할 수 없다. 연대는 오직 서로 '다름', 즉 분리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공감보다는 '이해'를 강조할 때 아닐까. 이것은 곧 가슴보다 머리,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은 동정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감에 의존한다.
이런 정의감은 지성(이성)의 산물이지 감성(감정)의 산물은 아니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