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갯수의 옷가지를 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안 입는 옷들을 즐겁게 솎는다. 대체적으로는 세분류로 나뉜다. 당근 마켓에 내놓을 것, 아름다운 가게에 갈 것 그리고 버릴 것. 가방이나 악세사리도 마찬가지다. 8년전 큰 마음 먹고 샀던 톰 포드 선글라스는 헐값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았다. 얼굴의 반을 덮는 버그아이 스타일의 선글라스가 다시 유행할 날이 올까? 오드리 헵번이나 재클린 케네디가 썼을 때는 클래식이었는데 내가 쓰니 다소 코메디 같긴 했다. 눈두덩이에 멍 들어서 최대한 가리려고 쓰는 그런 용도 말이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아름답게 처분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몇해째 넣었다 뺐다 하면서 결국은 처분하지 못한 물건도 있다. 올해도 처분하지 못했다. 샤넬백이다.
샤테크의 광풍을 타고 바람과 같은 속도로 처분할 수 있었겠지만 몇해째 처분하지 못하고 있다. 빈티지 어쩌고로 시작되는 그 모델을 손에 넣은 것은 10년여 전 결혼식을 준비할 때였다. 당시 주변에 있던 상당수의 지인들이 그랬다. 결혼을 준비할 때야 말로 예물을 핑계로 샤넬백을 장만할 절호의 찬스라고 말이다. 그 때 아니면 살면서 샤넬백을 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격식을 차리는 자리엔 역시 샤넬백만한 것이 없다고도 입을 모았다. 귀가 팔랑거렸다. 주변에 꽤 괜찮은 결혼을 했던 지인들이 결혼식장에서 검정색 샤넬백을 메고 왔던 것이 떠올랐다. 샤넬백을 메고왔기 때문에 괜찮게 느껴졌는지, 아니면 괜찮은 결혼이라 샤넬백처럼 느껴졌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 전까지는 한번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컬러풀한 스커트에 티셔츠를 즐겨입는 내 옷차림과는 상상하기 힘든 조합이기도 했다. 스드메라 불리우는 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과정을 패스하고 내 오피스텔 단칸방에 침대 하나만 사서 결혼계획을 세우는 패기 넘치던 시기였지만 샤넬백 앞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신혼집에 장롱이 없는건 창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중요한 자리에 들고 갈 샤넬백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장롱이 없는건 일부러 선택한 신선한 충격처럼 느껴졌지만 샤넬백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었다. 필요 없다고 깎아내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비싸지만 그때도 비쌌다. 샤넬백을 산다면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신혼여행을 희생해야 할 터였다. 다행히 신혼여행을 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를 가엾게 여긴 지인 하나가 도매전문 상가에서 에이급 샤넬 가방을 구해주었다. 개런티 카드에 시리얼 넘버까지 착실하게 붙어있는 스페셜급이라고 했다. 겉은 반짝반짝한 검정색 페이던트로 빛나고 안에는 부드러운 버건디색 가죽으로 덧대어져 있는 2.55 클래식 빈티지라는 모델이었다. 파리를 부지런히 다니면서도 샤넬 매장은 관심이 없어서 들어가 본 적도, 진짜 샤넬백을 들어본 적도 없는 처지였지만 지인이 자신만만하게 내민 가방은 얼핏 보기에 감쪽같아 보였다. 어깨에 메어보니 묵직했다. 체인이 치렁치렁해서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쨌거나 샤아넬. 나도 이제 남들의 결혼식에 ‘괜찮은’ 결혼을 한 유부녀로서 당당하게 들고다닐 가방이 생긴 것이었다.
오늘 살 때가 제일 싼 것이고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샤넬백의 가격은 두배가 넘게 뛰었기 때문이다.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진짜를 마련하는 편이 좋았을까? 아직도 답은 잘 모르겠다. 나로 말하자면 애석하게도 가짜 샤넬백을 들고 가야할 만큼 격식있는 자리를 만나지 못했다. 남의 결혼식 시즌은 잠깐이었고 장례식에는 늘 헐레벌떡 달려가느라 들고 간 적이 없다. 동창회를 비롯한 각종 모임은 왠만해선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들고 다니는 것은 보부상 스타일의 가방 뿐이다. 샤넬백을 들고 다니던 지인들은 출산 후엔 다른 컬러의 샤넬백으로, 결혼기념일에는 에르메스로 소비의 행보를 넓혀갔다. 평소 디자인적으로 엄선된 물건만을 골라서 사던 지인마저 앞으로 가방을 한개만 사야 한다면 버킨백을 사겠노라고 말했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디에 들고 갈 예정이냐고 말이다. 학부모 모임에 메고갈 것이라고 했다. 집에 있는 내 가짜 샤넬백이 생각났다.
모든 물건은 욕망 플러스 기대감을 포함하여 구매한다. 사실 내 옷장 속 가짜 샤넬백의 존재는 평소엔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오직 이사를 가거나 계절옷 정리를 하느라 버릴 것을 구분해야 될 때 ‘나야 나’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예쁘거나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타인들에게 괜찮은 결혼을 했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 구매한 내 가짜 샤넬백, 가짜를 샀다는 내 자신이 싫어서 중고로조차 처분하지 못하는 내 가짜 샤넬백, 매 계절마다 버릴까말까 망설이다 다시 옷장으로 들어가는 내 가짜 샤넬백,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할 것이었다면 진짜 샤넬백을 사는 것이 나을수도 있었겠지만 효능은 있었다. 가짜 샤넬백은 마치 냉동실에 보관해둔 요긴한 멸치육수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필요해서 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10년째 증명해주는 산 증인이 내 옷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