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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타델레 Nov 03. 2021

손으로 하는 명상



친정에 갈 때 마다 시도때도 없이 바느질을 하고있는 나를 보고 아빠가 말했다. “손주 옷 만드냐? 우리 딸 아이키우더니 드디어 참해졌네” 오해였다. 아이 옷이 아니라 내 옷을 만들고 있던 참이었다. 바늘을 놀리고 있는 행위 만으로도 찬찬하고 얌전해 보인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빠의 반응은 이상하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끈기없고 덜렁대는 성격 탓에 중학교 가정 시간에 배우는 개더스커트 만들기 같은 것들도 잘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습시간에 배우는 바느질은 내게 의미도 없고 의지를 불러 일으키지도 못했다. 성실함마저 없어서 기말과제로 제출하는 당일이 되도록 놀다가 엄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공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만 놀리면 되는 바느질을 왜 미루고 미루다 안하느냐고 말이다. 결국은 엄마손에 완성된 개더스커트를 들고 터덜터덜 학교에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랬던 내가 이십년이 훌쩍 지나 밤낮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다니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만큼이나 대견한 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물론 잠깐만이다. 마당에 누워서도, 흔들거리는 차 안에서도, 깊은 밤에도 쭈그려 앉아 바늘을 놀리고 있노라니 나중에는 제발 바느질 좀 작작 하라는 타박을 들었다. 아니 언제는 참해 보여서 좋다면서요?



목이 말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새벽 1시 반이다. 1시반? 1시 반이라니. 바느질을 하려고 잠시 소파 앞에 앉았을 뿐인데 저녁 7시부터 여섯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손을 놀린 셈이다. 실 컬러가 바뀔 때까지, 팔 한쪽만 더, 기왕이면 몸통까지 가보자 하며 ‘한번만 더, 한번만 더’를 실천하다 보니 온 가족 3명 분의 옷 시침질이 거의 끝났다. 하고싶은 것이 생기면 근성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하나보다. 투박한 치앙마이식 손바느질을 배운지 2년 반쯤 되었다. 몇가지 방법이 필요할 뿐 거창한 것은 아니라서 누구나 1시간 정도면 배울 수 있다. 예전에 우리네 엄마들이 이불 홑청을 꿰매던 것 같은 두꺼운 실로 천과 천 사이를 잇는 것이 기본이다. 모든 작업은 옷감의 가장자리를 시침질로 한땀한땀 꿰는 것으로 시작한다. 손바느질하면 흔히 떠올리는 퀼트나 규방공예같은 섬세함은 없다. 재봉틀로 두두두 박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뭔가를 만들어내는 속도 또한 지난하기 짝이 없다. 마음이 급해서 필요 이상의 속도를 내면 안 그래도 큰 바늘에 허벅지나 손등을 찔리기 일쑤다. 운전을 할 때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염두에 두는 것처럼 옷감을 전방주시 하고 있어야 한다. 결과만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저능률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시침질이 끝나면 옷감끼리 이어붙이기에 돌입한다. 여기에 손바느질의 묘미가 있다. 흔히 말하는 옷본이라는 것이 필요 없는 것이다. 2D의 작업이 3D가 되는 과정은 간단하다. 옷감을 나의 몸에 대어 본 다음 앞판과 뒷판을 구별하고 이을 부분을 체크 한 후 잇기 시작하면 옷이 된다! 놀랍게도 그냥 잇기만 하면 된다. 방금 전까지 냅킨이나 식탁보처럼 납작한 천에 불과했던 것들이 실로 엮은 뒤 몸을 넣어 입기만 하면 입체적인 형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이나 힌두교 여성들이 입는 사리 모양의 원피스를 떠올려보자. 그것도 어렵다면 군고구마 봉투나 수퍼마켓 봉지라도 말이다. 아이의 옷을 만들어 주느라 재봉틀을 배우고 주어진 옷본에 따라 재단을 한 후 박음질은 해 본 적은 있지만 그동안 옷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맞는 목둘레, 소매의 길이, 카라의 모양 같은 것은 의류회사에서 출시하는 소재와 디자인대로 돈을 지불하고 선택하면 되는 건 줄로만 알았다.



옷을 골라서 구매하던 소비자에서 내 몸에 맞춰 생산해보는 창작자가 되는 경험은 스스로에 대해 섬세하게 알게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몸통은 좁은 편이고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팔뚝은 통통한 편인데 어떤 옷은 44가 맞았고 어떤 옷은 55인데 작았으며 때로는 66이 나을 때도 있었다. 44라고도 55라고도 66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기성품은 44나 55나 66 세 사이즈 밖에 없었다. 딱 맞는 옷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바느질을 시작하고 처음 만들어 입었던 리넨 탑은 바느질이 서툴어서 만듦새가 엉성했지만 헐렁하지도 또 죄이지도 않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천을 몸에 수없이 대보면서 바늘을 놀렸던 결과였다. 달걀 후라이를 할 줄 알게 되면 달걀지단,스크램블에그, 오무라이스 등등 달걀을 사용한 각종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엔 작은 가방으로 시작했던 손바느질은 천과 천을 잇는다는 원시적인 개념을 이용해 원피스,팬츠,로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목으로 확장 되었다. 인류가 입었던 ‘옷’이라는 것이 결국 천 한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깨달음이었다. 



태국 북부의 어느 부족 마을에서 유래되었다는 손바느질에 빠진 것은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굵은 실로 성글성글한 천을 꿰다 보면 어린 아이가 쓴 글씨처럼 삐뚤빼뚤 하기 일쑤였는데 나에게 바느질을 알려준 이도 그리고 치앙마이에서 바느질을 한다는 바느질 선생도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야 이 ‘프리 스타일 바느질’은 오케이라고 했다. 좀 더 꼼꼼하게 꿰거나 무늬를 더할 수는 있지만 꼭 어떤 방식으로 ‘해야만’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치앙마이식 손바느질의 미덕이었다. 한두땀 정도 빼먹거나 잘못 잇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바늘을 놀려 무늬를 넣거나 실을 푸는 등의 변주가 가능해서 망한 부분을 쉽게 살릴 수도 있었다. 뿐인가. 큰 흠결이라고 느껴졌던 부분도 완성해서 몸에 걸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스타일 바느질러들에게 잘 만들어진 옷이란 화려하거나 예쁜 옷이 아니라 입을수록 내 몸에 편하고 익숙해지는 옷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천을 잇는다’는 것만 명심하면 실험 정신을 가미하여 거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패브릭 회사에 다니며 예뻐서,아까워서,좋아서 등의 핑계를 대며 갖가지 천을 수집해 왔지만, 그것들은 옷장에 들어간 이래 한번도 세상 구경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재봉틀을 사면, 나만의 작업실이 생기면, 시간이 나면, 하고 미루기만 했다. 바로 지금이 천들을 꺼내 꿰매어 줄 절호의 찬스였다.



공들여 만든 옷을 셀프로 입는 기쁨도 크지만 이토록 정신없이 손바느질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여름 이웃들과의 캠핑에서도 나는 바느질거리와 함께였다. 눈 앞에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도 머리엔 헤드랜턴을 걸치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한 편의 코메디 같기도 했다. 나를 지켜보던 이웃이 “밤낮으로 바느질 하던데 썩 잘하는 것 같진 않네요.” 라고 농담반진담반으로 말했을 때도 무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궁금증이 많고 솔직한 성격일 뿐이니까. 심지어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한번 해보실래요? 이건 잘하지 않아도 돼요. 하다보면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대답을 하면서 깨달았다. 손바느질의 매력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순간에도 바늘을 잡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의 편안해졌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바늘과 실을 들고 앉아 가장 기본적인 시침질부터 시작한다. 한번 실을 꿰고 나면 그 실이 끊어질 때까지 ‘한번만 더, 한번만 더’를 외치며 다음 스티치를 향해 맹렬히 나아가는 것이다. 망하더라도 다시 되돌아올 수 있고 내가 쏟은 시간만큼 땀수는 촘촘해진다. 바늘을 들고 복잡했던 마음이 가다듬었을 뿐인데 아이의 여름 윗도리며 주방 행주들 여러개가 뚝딱 만들어졌다. 잘하지 않아도 되고 정교하지 않아도 된다. 바늘을 잡으면 일단 전진하는 거지. 이것은 어쩌면 손으로 하는 명상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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