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이유, 사는 이유
난 절박했다.
가는 곳마다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허무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웃으며 날붙이를 생각하는 법을 오래전에 터득해 둔 터였다. 유혹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총과 면도날과 잠의 편안함이 세상의 혼란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고…어느 날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눈동자에서도 허무의 그림자를 보기 시작했다.
그 옛날 희랍인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거인이 떠받들고 있다고 믿었단다. 또 다른 신화에는 신을 기만해 돌을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라는 인물도 있다지. 난 돌덩이가 굴러 떨어지더라도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그와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그를 동시에 생각했다.
아, 그 옛날 옛적부터 사람들은 삶이 무거운 형벌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말이다. 진동벨이 내 차례를 알리고 나는 진료실로 들어간다. 문에서부터 주치의 선생님이 앉아 계신 책상까지는 은근한 거리가 존재하므로 작은 복도가 하나 존재한다. 이젠 너무 익숙한 그 복도를 지나 더 익숙한 1인용 소파에 걸터앉는다. 반복되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뻔하다. 너무 뻔해서 지겨워.
‘무슨 일이 있었니?’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께서 대뜸 물으신다. 책상 위엔 좀 전에 진행한 심리 검사의 결과로 보이는 종이가 하나 있다. 알 수 없는 숫자가 잔뜩 찍혀있는 그래프. 선생님이 쓰시는 키보드는, 오늘따라 바빠 보인다. 늘 그랬듯 나는 내 차트를 볼 수는 없다. 괜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그래프를 열심히 해석해보려 하지만 내겐 무리다.
‘지난번보다 더 안 좋아졌나요.’
결국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절제하기 전에 튀어 나가 버린 절박함. 내가 느낀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갈망.
‘그래프를 봐. 전부 튀어나와 있어.’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침착하고 여상한 설명도 함께 따라붙는다. ‘지난번보다 훨씬 안 좋아. 물론 지난번에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마 못할 말을 했다는 듯 흐려지는 뒷말.
나는 그거 듣던 중 안 좋은 소식이네요, 싶다.
난 해결되지 않는 나의 고민에 대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어쩔 수 없잖은가.) 나를 쫓아다니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 내 마음속 빗장을 풀고 나오는 우울에 대해. 선생님께선,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지 절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예술가는 원래 우울하고 예민한 경우가 많다고 하셨다.
‘그럼 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의도한 것보다 삐딱한 대답을 해 버렸다. 선생님 말씀을 듣자마자 마음속에 작은 금붕어 하나가 생겨버려 당황스러워. 그 금붕어가, 그 자그마한 기쁨이 헤엄치기 시작했는데. 내 삶에 이런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해 왔는데. 그 금붕어가 어떻게 살아났을까? 그 이유가 예술가로서 내 성질을 인정받아 그들 중 하나가 된 사실이 기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어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본인의 성향을 이해하고, 잘 관리해 봐야지. 절대 스스로 탓하지는 말고.’ 돌아온 해답은 간편했다. 나는 마음속 금붕어가 이리저리 기쁘게 헤엄치는 걸 느꼈다. 난 여전히 슬프지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설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쉬운 거였는데. 그렇구나, 그럼 계속해야만 하겠구나. 그럼 이게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겠구나.
나를 이해하기 위해, 또 세상에 더 있을 나와 같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계속 쓰기로, 계속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