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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두달홍천살이 Jul 21. 2021

강원도 홍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청년의 귀향 썰

한국 나이 30살, 고향에 눌러앉아 버리다


우리가 살면서 결코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장소가 아닐까.

'나'라는 사람의 시작점 말이다.


나는 강원도 홍천군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홍천에서 조상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신 토박이다.

엄마는 결운리, 아빠는 삼마치에서 나고 자라셨다. 둘 다 홍천읍의 중심은 아니다.

두 분 다 나름 시골인 홍천에서도 더 시골인 동네서 나고 자라셨다.

(홍천 안에서도 농업 종사 인구가 많고 인프라 시설이 부족한 중심지 외곽 지역을 '시골'이라 부른다.)


엄마는 십 대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읍내로 나와 사셨다.

아빠는 결혼 전부터 읍내에서 레미콘 운전사 일을 하셨다. (예순이 된 지금까지도 하고 계신다.)

나는 홍천읍 장전평리라는 친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6살까지 부모님과 살다가

핵가족이 되어 시골 밖 읍 중심가로 이사했다.

1997년, 부모님이 당시 홍천에서 가장 신식으로 건설된 15층짜리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이다.

이후 여동생이랑 남동생도 태어났다.

그 아파트에 살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모두 보냈다.

올해 4월을 포함해 같은 동네에서 두 번을 더 이사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두 분 다 유복한 가정 출신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나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두 분이 내 삶에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내게 '홍천'이라는 고향 정체성과 함께

두 분의 성격을 골고루 배합한 DNA를 선사해 주셨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내가 평생 지니고 가야 할 자산이자 인생의 과제다.


그동안 내가 살면서 거쳐온 지역들로 나의 지난 시간을 소개해 보려 한다.


홍천, 이곳에서 나는 0살 때부터 대학에 가기 전까지 만 18년을 쭉 살았다.

태어난 지 20년 차에 나는 경기도 용인이라는 곳에서 4년간 유학(?)을 떠난다.

그때 나는 '무조건 홍천을 벗어난다', '서울에 있는 일류 대학의 정치외교 또는 국제관계학과에 진학해

수년간 품어 온 내 꿈을 실현해 나갈 거다'라는 포부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서울은 못 가고 근처 경기도에 입성 성공! 꿈에 그리던 정치외교학 전공생이 된다.


이후 나는 홍천을 소위 '들락날락' 하는 '방문자' 신세가 되어버렸다.

학기 중 한 달에 한두 번 방문, 방학 때 방문해 한 두 달 있기를 반복했다.

3학년 여름방학은 인턴 같은 개념으로 태국에 2달 반 동안,

4학년 2학기는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약 6개월간 살다 왔다.


2015년 9월,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세종특별시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해

2016년 말까지 약 1년 3개월 간 석사생으로 살아간다.

홍천, 용인 다음으로 내가 세 번째로 오래 산 동네가 세종시다.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

개발정책학을 배워 보겠단다


당시에 나는 얼른 배워서 해외에 나가 생활하고 일해 보고 싶은 꿈이 컸다.

남의 나라 사는 세상이 너무 궁금하고 그 나라들의 발전에 개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내가 물려받은 DNA의 숙명이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나는 '미얀마'라는 동남아시아 국가와 인연이 되어

2017년에서 2019년 3월에 거쳐(중간 7개월은 홍천에서 보냄)  약 1년 6개월간

'봉사단' 신분으로 미얀마의 현지인이 되어 살아 보는 체험을 한다.


2019년에는 춘천에서 6개월간 직장생활을 하며 소위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강원대 후문 월세 18만 원 원룸. 수도 전기세 따로.

바퀴벌레가 가끔 출몰하는 방이었지만 나름 깔끔하고 경제적인 공간이었다.


2020년 우즈베키스탄에 봉사활동을 떠나려던 계획은 코로나 19로 무산.

모아둔 돈으로 1~5월 홍천에서 놀고먹고 하다가 서울 외교부에 덜컥 취업이 된다.

7개월간의 계약직 연구원이 된 것이다.

나의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시절의 꿈이었던 외교부 입성이라니...!

행복한 나날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서울 경복궁역 2번 출구 앞 서촌이라는 '핫한' 동네에서 '고시텔' 생활을 한다.

한 달에 37만 원. 보증금 없음. 밥, 김치, 라면, 계란 무료 제공.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 공간도 안 되는 비좁은 방이었지만

단기 거주를 하는 내게는 월급의 잔급을 최대치로 남길 수 있는 조건이었고

살면서 처음으로 서울에 살아 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나날들이었다.

6개월간 기구 필라테스를 등록해 일주일 세 시간을 꼬박꼬박 다니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의 첫 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20년 12월 31일 계약 종료.

서울에서 새해맞이를 하고 모든 짐을 싸 고향에 내려왔다.



이쯤에서 나의 거주지 이동 경로를 정리해 보자.      

홍천(18-> 용인(2년 반) -> 태국(2개월) -> 용인(1년) -> 미국(6개월) -> 용인(4개월) -> 홍천(2개월) -> 세종(1년 4개월) -> 미얀마(1년)-> 홍천(7개월) -> 미얀마(6개월) -> 홍천(4개월) -> 춘천(6개월) -> 홍천(5개월-> 서울(7개월) -> 홍천(현재 1년 5개월째 체류 중)



고향을 떠나 세상을 떠돈 지 11년 차가 되었을 때서야 (나는 11학번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인가)

나는 귀향했다.


이상하게 2018년부터 4년 동안 매 년 1~5월은 꼭 홍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는 취업이 돼 다른 동네로 떠났다가 또 1월이 되면 홍천에 돌아와 있었다.

사실, 내가 계약직만 연연 해서이다. (정규식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4년간 매 년의 상반기를 고향에서 보내다 보니

이곳에 정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올 해는 뭔가 달랐다.

이곳에 더 오래 있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사실 서울에서 외교부 생활을 아쉽게 마무리하고 돌아와서 얼마간은

다시 외교부에 입성하겠다는 열망으로 채용공고의 연구원 직종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서류를 지원했고 면접도 몇 번 봤다.

 

한동안은 그간 모아둔 돈으로 서울 고시원에 들어가 일 년을 눈 꼭 감고

외무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내 오랜 꿈이었으니 더 나이 들기 전에 시도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충동이 행동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제동이 걸렸다.

내 모든 것을 건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홍천에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고향에 남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까.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공존했다.


먼저, 또다시 살림 짐을 싸서 다른 동네로 떠날 자신이 없었다.

짐을 싸고 푸는 것에 지치기도 했다.

혼자 살면서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당장은 다시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홍천과

20대 중반을 넘긴 성인이 돼서 경험하고 바라보는 홍천에서의 일상은 달랐다.

홍천의 일상을 여행하는 여행자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경험들이 새로웠으니까.  


2019년 홍천에 있을 때 외국인이랑 교류하는 일상을 만들고자

홍천의 내 또래 원어민 영어교사들을 모아 모임을 운영했다.

홍천에 영어 좀 한다는, 외국에서 좀 살아 봤다는, 영어 좀 배워보고 싶다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교류해 보고 싶다는 홍천의 사람들은 다 모였다.


홍천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홍천 라이프를 만들었던 경험은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 주었다.

그때 홍천에 정이 좀 많이 든 듯하다.


내가 올해 5월을 넘기고도 홍천에 눌러앉게 해 준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직장 때문.

5월 말, 홍천에 취업이 됐다. 그것도 내 전공 및 관심사와 들어맞는 분야로.


홍천군 도시재생지원센터의 팀장. 팀장이라니!!!

30년을 살며 처음 달아보는 직함이다.

동아리 장, 봉사단 대표, 모임 개최자 같은 대표 자리는 맡아보았으나

생계로서 이렇게 책임 있는 자리는 처음 맡아본다.

그것도 홍천 지역의 발전을 위한 공공의 일을 맡다니. 게다가 급여도 그동안 받아온 금액보다 많았다.


내가 갈팡질팡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눈여겨보던 단체에서 공석이 난 것이다!

3월 홍천군 도시재생지원센터의 존재 사실을 알게 되고

자발적으로 적극적 인연을 맺게 되면서 (그 일화는 향후 소개하겠다)

'이곳이라면 내가 홍천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다'라는 생각을 했다.


해외 지구촌 사회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내 가슴속에는 항상 '지역활동가(또는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꿈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안에는 '외교관', '연구가', 'NGO 활동가', '출간 작가', '창업자', '가수', '연기자', '로컬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꿈들이 있었다.


여러 꿈들이 돌아가며 내 삶의 다양한 시기들을 장식했는데

올 해는 '지역활동가'라는 꿈이 발현될 시기인가 보다 싶었다.

가끔 내 의지랑 다르게 내 안의 어떤 것이 튀어나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내 동네를 배경으로 다양한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워낙 모임 만들기, 새로운 사람들과 네트워킹 쌓기, 공동체 활동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까.

홍천에서 이것저것 해 보고 싶었는데, 딱! 그런 일을 하는 단체가 내가 없는 사이 생겨난 것이다.

천운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기, 조건, 급여 등 모든 조건이 들어맞은...


5월 말, 같은 시기 국립외교원 공무직 연구원 자리에 지원해 면접까지 봐 놓고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천군도시재생센터는 이미 합격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만약 두 개 다 붙었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했다.


하나는 그동안 해 왔고 최근까지 돌아가고 싶어 했던 분야였다.

무기계약직에 국제정치분야 전문성을 쌓기 좋은 기회였다.

다만 급여는 전과 같았고 홍천을 떠나야 했다.


다른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지만 가슴 한편 오랫동안 선망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 들어서면 국제관계 분야의 경력이 끊겨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상황이 두려웠다.

 

약 일주일간 우울증에 걸릴 정도까지 심각한 고민을 했는데

싱겁게도 서울 일이 최종 탈락을 하며

나의 향후가 자동 결정되었다! 하하 김칫국을 마신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양손에 놓고 동등한 위치에서

나 스스로에게 치열히 고민하고 결정할 기회를 줬다는 점은 의의가 깊다.

내 마음 한편에는 고향에서의 일을 시도해 보는 것에 대한 끌림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을 누르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실패와 함께

기존에 쌓아 온 경력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내 나이 30이 되어, 내 삶에 새로운 시도의 기회를 제공해 보기로 했다.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려면 완전히 정 반대의 새로운 체험을 해 봐야 한다는 말이

어딘가에 떠돌고 있지 않았던가.


십 대 시절까지는 내가 살 곳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님의 생계와 학교였다.

대학 밖을 나와서 내 살 곳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고

그 조건은 자아실현과 소득생활이 동시에 가능케 하는 직업이었다.


6월 1일 화요일,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현재 2달째 전쟁 같은 수습 기간을 겪고 있다. (두 번째 월급날 또한 기다리고 있다!)

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어깨를 짓누르며

매일 매 순간 정신과 자존감이 무너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오는 자극과 경험 그리고 인연들은

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상당히 긍정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앞으로 나는 홍천에 귀향한 청년의 시선으로,  

나의 생업이자 새로운 도전 분야인 홍천의 도시재생에서의 경험을

그리고 홍천의 생활권자이자 일상 여행자로서의 이야기들을 풀어가 보려 한다.

기록을 잘 남기면 나중에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무언가 남지 않을까.


지방살이 & 새로운 도전 분야에 대해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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