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떠난 30일간의 배낭여행 10/30
페트린 공원 - 스트라호프 수도원 - 프라하 성 - 존 레논 벽 - 까를교 - 하벨시장- 틴 성모 마리아 교회 - 천문시계 - 화약탑 - 현동 오빠와 저녁 - 유대인 지구 산책
민박집 도미토리룸에 사람이 가득하다.
문과 화장실이 가까운 가장 시끄러운 자리밖에 남지 않아 그곳에 짐을 풀었다. 아침 샤워가 밀릴 거 같아 일찍 눈이 떠진 김에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날씨가 너무 좋다. 1분도 낭비하지 말아야지. 아침 식사로 국과 반찬과 밥이 나왔다. 그리운 쌀밥과 국물! 양껏 먹고 밖으로 나섰다.
티켓을 끊어 숙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페트린 공원까지 트램을 타고 갔다. 오늘 나는 이 곳부터 시작해 숙소 근처까지 도보로 프라하를 쭉 돌아볼 예정이다. 각오해라 다리야.
주말이라 그런지 페트린 공원에는 마라톤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트램 티켓이 있으면 푸니쿨라가 무료였던 게 생각나 공산주의 석상 근처의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엥? 문에 붙어 있는 공지문을 살펴보니 푸니쿨라는 10월 25일까지 운행이 중단됐단다. 으어 저 높은 공원을 걸어 올라가야 하다니, 그렇지만 전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국민인 내가 이깟 위기에 주춤할 수 있겠는가.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8년 전 예나 언니와 함께 왔던 생각이 나서 공산주의 석상에서 찍었던 사진을 언니에게 보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옮기는 발걸음 마다 그림 같다. 풍경을 보기 위해 몇 차례 발길을 멈췄다.(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고) 공원 중턱 즈음에서 노천 카페를 발견,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테이블 위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이 놓여 있어 가을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옆 테이블의 아기는 방긋방긋 잘도 웃는다.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 기분 좋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페트린 타워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페트린 타워에 입장하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나는 타워에는 오르지 않고, 옆 오솔길을 따라 스트라호프 수도원과 프라하성을 향해 걸었다. 오는 길에 함께 여행 온 모녀를 만났다. 오르막 길이 힘들어 페트린 타워를 보기 주저하는 그들에게 하산객이 등산객에게 말하는 것처럼 '조금만 가면 된다'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프라하 성에 들러 외국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더니, 카메라 세팅이 잘못돼 있었는지 동영상을 찍어주셨다. 감사합니다. 정말 생동감 넘치네요~ 수많은 관광객과 함께 프라하 성과 성에서 내려보는 프라하의 전망을 감상했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고. 이런 그림은 눈에 담아놔야지.
레넌 벽에 가는 길에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가서 보조 배터리로 충전을 시키려고 했다. 엥? 그런 게 이게 왠 걸. 갑자기 충전이 되지 않는다. 헉 큰일이다! 이러지 마. 누나 길치인 거 알잖아. 아무래도 케이블이 문제인 것 같다. 여기서 아이폰 8핀짜리 케이블을 구할 수 있을까? 즐거웠던 하루가 휴대폰 때문에 두려워지고 있다. 결국 레넌 벽에서 휴대폰은 방전되고 말았다.
휴대폰과 보조배터리를 들고 망연자실하게 배회하다 밑져야 본전이지 마음으로 그냥 케이블을 꽂아놓고 있었다. 응? 왠지 충전이 되는 느낌이다. 오분 정도 꽂아두니 휴대폰이 켜졌다! 신난다. 레넌 벽에서 사진을 찍고(또 영상을 찍어주심) 까를교로 향했다. 한낯 기계 때문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다니. 예전에는 종이 지도만 들고도 잘 다녔는데! 아아 취소다. 내가 괜한 소리를.. 부디 잘 살아 있어줘. 나의 아이폰 6.
까를교에 도착해서 블타바 강을 감상했다. 좀 전의 위기를 잘 넘겨서 인지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감상하고 있는데 어떤 아시아 여자가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란다. 강을 배경으로 한 컷 찍어줬더니 방향을 바꿔 이쪽에서도 찍어달라고 한다. 또 찍어줬더니 다른 방향에서 또 찍어달라고 한다. 결국 그녀는 나를 찍사로 다리의 동서남북을 모두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한 장도 찍어주지 않았다. 서운하다는 건 아니다.
까를교를 건너 카프카가 자주 갔다던 카페에서 팬케이크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하벨시장으로 향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까를교를 그린 그림 한 장을 50코루나(2,500원)에 구매했다. 그리곤 다시 열심히 걸어 프라하의 명물 틴 성모 마리아 교회, 화약탑과 천문시계 등을 관람한 뒤, 근처 벼룩시장에서 3,000원을 주고 예쁜 터키석으로 만들어진 귀걸이 한쌍을 골랐다. 손에 든 것이 많아서 정신을 놓아 버릴 지경이라 숙소에 올라가 이것저것 산 것들과 짐을 정리하고 8년 전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현동이 오빠와 저녁을 먹으러 까를교로 향했다.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아서 트램을 탔다.
현동이 오빠는 8년 전 예나 언니와 함께 배낭여행을 할 당시,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이후 일정을 맞춰 비엔나에서 같이 오페라 나비부인을 관람한 사이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연락하고 지내다 갑자기 작년부터 프라하에서 가이드로 일하게 됐다며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오빠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강남역에서 알찜에 맥주를 마시며 올해 안식휴가를 동유럽으로 다녀올까 고민 중이라는 얘기를 꺼냈었는데 이렇게 정말 프라하에서 만나게 될 줄을 몰랐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이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것은 쉽지 않은데 희한하게 몇몇 이어지는 관계들이 있다. 오빠와 함께 스비치코바와 코젤을 먹으며 외국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지,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 그리고 반대로 한국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얘기했다.
저녁을 먹고 함께 유대인 지구를 산책했다. 프라하에서는 아이콘 페스티벌이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조명과 함께 피아노가 광장에 놓여 있고,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 프라하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맑은 밤하늘의 백조자리를 구경했다. 충만한 하루다. 과연 내 인생의 몇 퍼센트가 이런 날 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 절반만 되더라도 참 좋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