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고
네이버 블로그에는 나의 20대 후반 사회생활의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다시 꺼내보니 새삼 새롭다. 이렇게 삶이 정체되는 거 아닌가를 고민했던 나의 20대 후반의 고민들. 그때의 나와 다시 만나면 고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너는 어딘가에 정체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오히려 적당히 스스로를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다. 힘을 좀 빼고 의욕을 거두면 삶이 더 윤택해질지 모른다고.
엊그제 부로 만 34세로 어려진 나는 현재 필리핀 세부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다. 몇 년 전 글로벌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시작한 영어 공부가 동기가 되었다. 콘퍼런스 콜에 참석하기 위해 억지로 시작한 영어 공부는 점차 재밌어졌고 생활의 활력이 되었다. 숨고로 섭외한 영어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스피킹 연습을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문장을 영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때 생각한 게 EBS 어학 프로그램이었고,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귀트영, 입트영, 파워 잉글리시, 이지라이팅 등을 들으면서 인풋을 늘려나갔다. 매월 4,900원에 훌륭한 ESL 프로그램을 수강할 수 있다니, 공영 방송 만세!
물론 바빠서 방송을 못 들을 때도 많았고,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펴보지도 못한 적도 무지 많았다. 그렇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리셋하고 완벽하게 시작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대충 꾸준히의 미덕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나에게 쌓인 대충의 시간들로 이제는 대충 하고 싶은 말을 더듬더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올해는 뜻하지 않게 회사를 쉬게 되었고, 남편의 출장에 동행해 두 달 정도 미국 캘리포니아 밀피타스 지역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나는 매일 아침 남편을 회사에 데려다주고, 지역 교회의 ESL 클래스에 참석해 수업을 들었다. 그 지역 아시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듣는 수업이었는데, 아주 재밌고 따뜻했다. 리스닝과 스피킹만 되는 한국 할머니, 리딩과 라이팅만 가능한 중국 할아버지, 올 때마다 본인의 백 야드에서 키운 농산물을 나눠주는 타이완 할머니 등 가지각색의 다양한 어르신분들과 어울리며 친구가 되었다.
6주간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던 중 남편의 일정이 바뀌어 나는 급작스럽게 미국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별을 소식을 전하던 날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다. 이디엄 수업 전 모두 다 함께 일어나서 체조하던 그 시간이 그립다. 중국 할아버지 렁의 두껍고 낡은 영중 사전도 보고 싶고 따뜻한 한국 할머니 영도 너무나 보고 싶다. 나의 모든 시니어 친구들이 건강히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던 ESL 수업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하이, 하와유로 안부를 묻고, 외로운 이민자들끼리 따뜻한 정을 나눴던 미국에서의 경험이 이번 어학연수로 이어진 것 같다. 밀피타스는 나에게는 이상적인 사회였다. 내 나이의 두 배가 넘는 할머니와 입고 있는 티셔츠만으로 몇 시간 동안 스몰 톡을 나눌 수 있다니. 대화의 내용 속에 출산, 직업, 수입, 부동산에 대한 주제가 없을 수 있다니.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다시 돌아온 한국이 더없이 차갑고 인색하게 느껴졌다. 영어를 더 잘하면 한국 이외 다른 곳에도 나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쉬는 동안 공부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필리핀 세부 막탄섬의 한 어학원에 와있다. 앞에 써놓은 글을 보면 여기서 이 악물고 공부를 열심히 할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동안 영어 수업을 받고 이후 자습을 한 뒤, 헬스를 하거나 수영을 하고 기숙사에서 잠을 잔다. 쉬는 날에는 바다에 가서 놀기도 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 가기도 한다. 한, 중, 일, 타이완, 베트남, 필리핀 등 다양한 아시안 사람들이 모여 있어 마치 아시안게임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매끼 나오는 밥이 맛있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경험이 즐겁다. 남편과 가족이 그립기도 하지만, 이제는 견딜만하다.
현재 기준으로 연수를 시작한 지 2주가 흘렀다. 나의 룸메이트는 엄청나게 슈퍼 귀여운 25세 일본인 친구고 그녀 덕분에 두 명의 또 다른 일본인 친구들이 생겼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62세 양산에서 고깃집을 엄청 크게 하는 어르신과 비트코인으로 부자가 된 또 다른 타이완 태생 일본인 아저씨와 함께 삼겹살을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슈퍼에 가기도 한다. 연령도 국적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시간을 함께 보내니 웃기는 일들이 아주 많이 생기는데 흘려보내자니 아깝다. 짧게라도 적어놔야지.
20대의 일기를 읽어보니 현재 나의 삶이 그때의 내가 바라던 삶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직업이 없어져서 불안했는데, 그러지 말고 잘 즐겨야겠다. 내가 원하는 더 큰 세계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중이라고 믿어야지. 이제 마무리하고 숙제를 해야 한다. 오늘은 해피 프라이데이. 근처 한인 식당으로 삼겹살 먹으러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