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어학연수에서 만난 한국인 시니어 친구들
내가 지내고 있는 어학원은 30대 이상 학생들이 많다. 30대-40대까지는 아시아권 나라 중 일본인 학생들이 가장 많은데, 50대 이상 학생의 경우 한국인분들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도착하는 날 세부 공항에서 마주친 양산에서 갈빗집을 크게 하시는 사장님도 환갑이 지난 나이에 영어 공부에 재도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하셨고, 매일 하루 8시간 넘게 학원 자습실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신다.
나는 늘 한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사람의 나이에 선을 긋고 자격을 심사한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필리핀에서는 아이러니하게 한국인이 가진 사유의 자유로움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싶었던 것에 도전하는 50대 이상의 한국인 학생들을 보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여러 가지들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한 하루하루다.
갈빗집 사장님은 장성한 두 아들딸과 11살 막둥이 딸이 있고, 아내분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신다. 처음 공항에서 만났을 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셨는데, 학원에서 공부한 지 3주 차가 되니 단어들을 연결해 의사 표현도 하시고 농담도 던지실 정도로 급 발전하셨다. 그리고 이분은 등단한 시인이 시기도 하는데, 매 주말 나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직접 지은 시를 보내주신다. 같은 날 도착한 인연으로 이래저래 뭔가 필요하실 때 조금 챙겨드리곤 했는데 그에 대한 감사 표현 이신 것 같다. 또, 일본어를 원어민 급으로 잘하셔서 나의 룸메이트와 일본인 친구들과도 재미나게 잘 지내고 계신다.
지난 주말 사장님은 나에게 오랜만에 공부를 하니 참 좋고 재밌는데, 눈도 아프고 목도 아파서 화가 난다고 카톡을 보내셨다. 망막에 질환이 있으신데, 글자를 오랫동안 보니 눈이 자꾸 아프시다고. 공부하고 수영하며 보내는 이 시간이 참 좋은데 몸이 안 따라주니 분통함을 느낀다고 하셨다. 앞으로 남은 여정을 무사히 마치길 기도해달라며.
어학원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50대 한국인 여성분 써니는 영어 공부를 해보는 게 평생소원이라 필리핀으로 오셨다고 한다. 첫째 주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드리자 써니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너무 힘들다고. 다른 사람들은 줄줄 영어를 내뱉는데 자기는 한 마디도 못한다고 슬퍼하셨다. 괜찮다. 적응 기간이라 그렇다고 말하며 학원에 상주하는 한국인 매니저에게 사정을 얘기해 레벨을 바꿔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자 그래도 괜찮겠죠?라고 하며 무겁게 발길을 돌리셨다. 이후 우연히 마주친 써니에게 안부를 묻자 몸살이 나서 힘드셨다고 한다. 마침 오후에 마사지를 받을 계획이 있어 같이 가자고 권유 드렸고 함께 근처 마사지 숍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2주 차가 지나자 변경한 레벨이 잘 맞으신지 써니의 표정은 점점 밝아지셨고 스스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하셨다. 조심스럽게 그랩 앱 설치법과 구글 지도 사용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지 부탁하셔서 휴대폰에 그랩을 설치해 드리고 지도 보는 방법을 안내해 드렸다. 이후 써니는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시내로 커피도 마시러 나가기도 하면서 활기차게 어학원 생활을 즐기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텔로미어가 짧아지며 둔해지는 신체가 이들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지만 이것 외에 이들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다른 누구보다 엄청난 열정과 활력을 갖추고 도전하는 갈빗집 사장님과 써니에게 필요한 건 단지 조금의 친절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에 대한 친절한 안내, 조금의 서툶에 대한 너그러움만 지원된다면 이들의 역동성은 금세 활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청난 활기를 가진 한국인 시니어 학생들을 만나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얻는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버려본다. 나이는 쇠퇴함의 척도가 아니라 성숙함의 척도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엄청난 잠재적인 역동성을 갖춘 한국인들이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하고 너그럽기만한다면 사회 문화적으로 더욱 눈부신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듀오 링고로 영어 공부하는 아빠가 생각난다.
내년에는 세상 총명하고 성실한 우리 아빠 유학 보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