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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어른 Jan 10. 2024

버스에 갇혀있던 16시간, 크리스마스의 악몽

겨울 록키, 밴프 여행 시 우리 같은 경험은 하지 않기를.

캠룹스에 온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독감으로 고생한 정우도 건강해졌다. 사촌동생 Gina가 차려주는 밥 먹으며 푹 쉬었다. 거실 통창으로 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그래도 캐나다에 왔으니 록키산맥은 봐야지?

겨울 록키산맥과 밴프 여행에는 렌터카보다 투어버스로 가는 게 안전하다는 제부의 말에 투어를 알아본다. 3박 4일 일정이면, 록키산맥과 레이크루이스를 지겹도록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대체 얼마나 멋지기에 다들 칭찬일색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우리만의 특권이다.


"오빠~ 크리스마스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호선생은 '크리스마스인데 집에만 있을 순 없지' 라며 동의했지만, 한편으론 조용하고 평화로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했단다.




픽업 예정시간보다 한참 늦은 오후 4시쯤 도착할 거라고 연락이 왔다. 

"눈이 많이 와서, 밴쿠버에서 캠룹스까지 오는 시간이 늦어진다고 하네..."

밴쿠버에서 캠룹스까지 4시간 거리인데 8시간이 걸렸단다.

이것이 고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줄이야.. 

로키 초행인 우리는 알지 못했다. 패키지 투어는 몸만 따라다니면 되니까, 투어 프로그램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호주 블루마운틴 1 day 투어 이후 처음으로 여행 예약에서 해방되기에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큼 편한 게 없다. 남이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다고 하지 않나.. 


투어차량에 탑승 후 가이드에게 설명을 듣는 중,
앞 일을 예견하지 못한 채, 그저 밝은 표정
눈길을 헤치고 록키를 향해 출발!!!



기대했던 로키투어는 낭만의 상징 '눈, 폭설' 앞에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폭설로 도로가 통제되었다. 금쪽같은 크리스마스 연휴 이틀 동안 버스에 갇혀 있다. 거기다 모든 음식점들이 문을 닫는다. 크리스마스 같은 대목에 문 닫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모두가 쉬는 휴일이니 당연히 식당도 쉰다는 그들의 논리에 할 말이 없다. 덕분에 3박 4일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편의점의 차디찬 샌드위치와 컵라면뿐..

 

그 상황에서도 투어 가이드의 표정과 매너를 보며 인생의 미학을 배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떠오를 정도로 여정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마 그도 속이 까맣게 탔을 거다. 3박 4일 중 이틀을 버스에서 이동하며 보냈기에 계획된 일정은 엉망이 됐고, 가이드가 여행사를 대표해 총대를 메야하는 상황이다. 만약 그가 미소를 잃었다면, 투어 고객들도 자제력을 잃고 민원이 폭발했을지 모른다. 투어 회사가 운이 좋았던 건, 40여 명의 손님 중 진상 고객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거다. 그나마 우리는 캠룹스에서 합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새벽 6시에 밴쿠버에서 출발했다. 우리보다 8시간 더 버스에 갇혀 있던 데다가, 이틀 내내 버스에만 있으니 내색은 안 해도 다들 속에서 천불 났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눈은 쏟아졌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이동 중에도 눈은 그치질 않는다. 도로 통제가 풀릴 때 움직였다가, 통제되면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버스투어의 정의가 '버스에서 계속 있는 투어'로 착각할 정도로 좁은 좌석에 갇혀 있다. 디스크가 있는 나는 아픈 허리를 어떻게든 덜 느끼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내가 미쳤지.. 크리스마스에 로키투어를 왜 예약했는지.. 어흑"


휴게소 앞 쌓여있는 눈, 며칠간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렸다.


둘째 날 아침 7시에 통제된 도로가 통행 해제된다더니, 밤사이 내린 눈으로 여전히 통제됐다. 새벽 5시 반에 모닝콜은 대체 왜 한 거야!! 이른 새벽부터 아이를 깨워 준비해 조식을 먹고 다시 숙소에서 무한 대기하란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이야!!!!!

투어 고객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가이드는 일정에 없던 새로운 루트로 우리를 데려간다. 어차피 록키에는 못 가니, 인근의 '살몽암'이라는 강가 주변을 구경하기로 했다. 연어들이 회귀하는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좌 : 새벽 5시반 살기위해 아침 먹는 중 /   우: 살몽암 호수를 바라보며,   
살몽암이 있는 호수


잔잔한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문 연 식당 하나 없고, 어제에 이어 휴게소의 차가운 샌드위치와 컵라면으로 연명한다. 상상이나 했을까,,, 크리스마스 디너가 컵라면과 인스턴트 햄버거 일 줄이야.. 심지어 술도 안 판다. 윽.








통제된 도로가 해제되어 셋째 날 새벽 1시 반이 돼서야 키로 진입했다.

이틀 내내 록키까지 이동하는데 모든 일정을 할애했다.



록키 초입의 호텔에서 숙박하고 아침 일찍 원래 목적지 Banff와 레이크루이스로 떠난다. 새벽에 도착한 호텔이 어디였는지도 모른 채, 대충 씻고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 밖으로 엄청난 절경이 펼쳐진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녹초가 된 상태로 로키에 오른다. 투어 시작 후 이틀 내내 버스와 산속 inn에 머물렀지만, 다행히 셋째 날에는 날씨가 풀려 그동안 못한 일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Banff에서의 시간은 고작 40분. 이틀간 일정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하루에 이틀 치 일정을 모두 소화해야 한다. 목적지를 찍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40분 머물렀음에도, 정말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시원하게 탁 트인 로키산맥의 절경.. 말이 안 나온다. 설산이 훨씬 멋지다더니.. 정말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환상적인 풍경이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니, 저절로 다정해진다. 정우는 눈놀이에 여념이 없다.
정말 추웠다. 하버드에서 구입한 털모자가 유용하게 쓰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banff 전망대에 올라간다. 정상에 올라서서 보는 느낌은 또 다르다. 하얀 눈으로 덮인 설산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그간의 고생을 만회해 주는  하다. 그러나 하루 14시간씩 버스 이동하며 올만한 풍경인가? 미안하지만 No!


점심식사를 위해 Banff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설산을 배경으로 유럽풍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마을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불리는 레이크루이스로 간다. 여기서도 허락된 시간은 고작 40분...

하지만 그 시간만으로도 감사하다. 레이크 루이스의 겨울과 여름 풍경은 많이 다르다. 호수가 꽝꽝 얼어붙는 겨울에는 설산을 바라보며,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 위로 며칠 째 쏟아진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


여름이면 청명한 하늘과 돌산, 에메랄드빛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커다란 나무와 설산, 꽝꽝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서.
쌓인 눈을 걷어내니, 얼음 호수가 정체를 드러낸다. 아이는 그저 신났다.




그렇게 우리의 로키 투어 여정은 끝났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눈사태로 막힌 길을 대포로 부쉬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이 여정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면 이제 몇 시간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다. 5-6시간도 거뜬할 것 이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기억에 남을 크리스마스였고, 지금까지도 2달간의 캐나다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투어버스 속에서 보낸 아찔한 시간이다. 우리 세 사람 모두 고생했고, 너무 짧은 시간 머물렀기에 더욱 값졌던 Banff와 레이크 루이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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