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지였던 바르셀로나가 워낙 좋아서였을까, 마드리드는 왠지 삭막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마드리드의 매력을 몰랐으니까... Covid 기간 고된 가정보육 속 단비였던 넷플릭스 드라마 <Casa de Papel : 종이의 집>을 보고 난 후 마드리드가 궁금해졌다. 세계 3대 미술관 '프라도'를 가보고 싶다는 무난한 이유까지 더해졌다.
마드리드에서 2주간 머무르기로 했다. 근교 소도시도 여행하며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 앞으로 숙소 이동을 최소로 하기로 했다. 도시를 옮겨 다니는 게 힘에 부친다. 어느새 여정도 7개월이 넘어섰고, 그동안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도 때로는 한 곳에서 오래 머물 것이다. 짐을 싸고, 다시 풀고, 이동 후 새 숙소의 공기와 공간에 적응하고 다시 짐을 챙기고, 이동해서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모든 과정에 지쳤다. 적어도 2주간은 짐 싸기와 숙소, 항공편 알아보기에서 해방된다는 생각만으로 행복하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머무는 숙소다.
아무리 멋진 인생 여행지라도 하루 10시간 이상 머무는 숙소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과 음산한 주변 거리... 냄새나는 침구에, 온수가 잘 안 나오고, 추워서 덜덜 떨며 잠들며, 감기 걱정을 해야 하고, 실내 공기가 탁해 아침이면 목소리가 안 나오는 숙소라면???
아무리 환상적인 인생 사진을 남겼더라도, 인생 맛집에서 만찬을 즐겼더라도 밤이면 돌아갈 숙소 생각에 그 여행은 염도 조절에 실패한 음식이 된다. 그 여행지는 좋은 추억의 오점이며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곳이 된다.
우리는 에어비앤비 현지 숙소에 주로 머물기에 숙소 선택이 정말 중요하다. 특히 어린 정우가 있기에 일교차가 심한 계절이라면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숙소 찾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괜찮은 숙소를 구할 수 있다. 이제는 가성비를 크게 따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예산과 조건에 맞는다면 그걸로 감사할 뿐.. 2주나 머무는 이번 경우에는 숙소 선택이 몹시 중요하다.
숙소 예약 시, 1주일만 예약해서 입실 후 숙소 컨디션을 확인하여 추가 기간을 연장하는 방법은 주식투자에 비유하자면 '분할 매수'인데, 장단점이 있다. 한 번에 전 기간을 예약하는 것보다 가격이 비싸다. 입실 첫날 숙소를 확인 후 만족하여 1주일 연장하려 할 땐 이미 예약불가한 상황이 많았다. 주식처럼 절반만 매수한 뒤, 시장 상황을 보고 추가 매수하려 했는데, 너무 올라버려 추가매수를 못하는 상황이다.
* 남편은 주식 투자할 때도 투자 예산을 한 번에 매수하는 편이다. 결정을 하기 전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한다. 숙소 찾기 역시 마찬가지다. 2주간 머물 숙소를 찾기 위해 밤 잠을 설쳐가며 공 들였다.
한 도시에 머무르는 기간이 정해지면, 그 기간 내내 한 곳에만 머무르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 원칙은 언제나 성공을 부른다. 원칙을 습관으로 만드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닐까.
마드리드 여정에서 가장 잘한 일은, 95점짜리 숙소를 예약한 것이다. 스페인 광장까지 도보 1분, 마드리드 왕궁까지 4분, 최고 번화가 그랑비아까지 2분, 지하철역 1분 거리의 최고의 숙소다.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스페인 광장에 있는 대규모 최신식 놀이터로, 5살 정우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역대급 풀 패키지 놀이터"라는 선물이 숙소 1분 거리에 있다. 덕분에 매일 아침 알람처럼 들리는 소리...
엄마! 아빠! 놀이터 가요!!
마드리드 왕궁 근처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스페인 누나들이랑 같이 :)
여행을 바라보는 관점이 7개월 전과 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에서 하루종일 휴식을 취해도 누적된 피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더욱더 편안함과 평온함 그리고 느림의 여유를 갈망하게 된다. '하루에 한 곳만 가기'로 다짐해 보지만, 쉽지가 않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DNA를 버릴 수 없기에, 만 오천보 이상 걸으며 행군 아닌 행군을 한다. 보폭이 어른보다 짧은 정우는 하루에 몇 보를 걷는 걸까?
녀석이 가끔 힘듦을 토로하지만, 크게 떼를 부리진 않는다. 물론 아이스크림 안 사줄 때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나지만...
어른도 재미없는 걷기와 성당, 박물관, 미술관, 왕궁 관람을 5살 나이에 매일 하고 있다. 온종일 장난감을 갖고 놀아도 심심할 나이임에도, 투정이 적다. 아이가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고마움이 몰려온다. 정우도 인내를 배우고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우리 부부는 적어도 아이 교육에 있어 훌륭한 부모는 못 되더라도 나쁜 부모는 아닐 거라고 자평해 본다.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런지, 집 앞 1분 거리의 놀이터는 그런 미안함을 잠시나마 지울 수 있게 한다.
여행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때로는 양보가 필요하다. 우리 여정에서 정우가 원하는 곳을 33% 넣어야 공정한 게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어른 중심으로 여행 루트를 짠다. 한 번씩 아이가 원하는 놀이공원, 과학 박물관, 놀이터에 가지만 (정우가 좋아하는 곳에 막상 가면 우리도 재밌는 장소들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5살 정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긁고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해 줄 수 있다.
미술관, 전시 가느랴 고생한다. 꼬마 정우.
"정우야. 정우가 놀이공원이나 놀이터를 좋아하는 것처럼 엄마는 미술관에서 멋진 그림이랑 조각품 보는 걸 좋아해. 같이 가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