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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Dec 05. 2023

취미가 없어서 글을 씁니다


20대에 한 방송사에서 일할 때였다. 6개월간 준비한 24시간 생방송이 이틀도 안 남은 시점이었고, 모두들 못 자고 예민해진 상황에서 최종대본과 큐시트가 나와 점검하던 날. 시간은 이미 12시를 훌쩍 넘겼지만 15층 사무실만은 새벽의 경매시장처럼 밝았던 그때. 나를 비롯해 서브작가 셋이 머리를 맞대고 큐시트 시간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각각 총 80분, 5부를 맞추는 작업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분으로 떨어지면 좀 편했을 것을, VCR은 왜 4분이 아니고 3분 46초 19인지, 왜 CG의 길이는 12초인지 원망을 하면서 6진법 올림을 너나 할 거 없이 틀려 고전하고 있었다.      


그때 선배 작가가 등판했다.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검산까지 이르며 그 선배는 총 5부에 걸친 큐시트 시간 작업을 끝냈다. 넷이 계산해 적어도 둘이라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 과정에 밤을 새울 기세였던 우리는 경외의 눈으로 선배를 바라봤다. 그때 선배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 수학과 나왔어’    

 

사회생활을 하며 글에서 멀어질 수 없었던 내가 한결같이 좌절했던 지점은 전혀 다른 전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뛰어나게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볼 때였다. 굳이 글이 아니더라도 됐을 것 같은 사람들이 굳이 글까지 잘 쓰면서 자신만의 강점으로 잘 해낼 때, 나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기도 없이 그저 지극히 평범하다는 사실을 느끼며 괴로웠다.      



20대는 늘 더 잘하고 싶고, 더 잘해야만 할 것 같은 시기였고 비록 한 끗 차이였다고 해도 앞서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등을 보며 헤매는 일은 버거웠다. 내가 열정과 열망을 가지고 하고 싶어 하는 일에서 열등생까지는 아니지만 늘 중간 밖에 못 가는 노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한계였다. 다른 이들이 글쓰기에 지쳐 자신의 오랜 취미를 직업으로, 특기를 밥벌이로 제2의 직업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에도 읽고 쓰는 게 전부였던 나는 다른 세상으로 옮겨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꾸준하지도, 잘하지도 못했으면서.     



20대를 통과해 삶을 가로지르는 사이 40대가 되었다. 추진력과 치열함을 잃은 대신 뻔뻔함과 관대함을 얻은 40대가 되어서야 ‘뭐 어때?’하는 마음으로 살아 볼 수 있게 됐다.     


삶을 밝혀가는 것은 어쩌면 좋아하는 마음, 그 하나가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런 마음이라면 쓰는 일 자체를 즐겨 볼 수도 있지 않겠냐고,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시간을 온전히 채우는 기쁨을 누려보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잘하지 못하면 또 어때, 나는 오늘도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특출난 특기가 없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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