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를 성체줄기세포로 비유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면접을 봤다. 어떤 면접인지는 아직 공개할 수는 없지만, 박사 후의 커리어를 위한 면접이라고만 우선 해두겠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면접 중에, 그리고 면접을 복기하면서 머리 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다.
이제 막 박사디펜스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한, "프레시 닥터"는 무엇인가?
햇박사.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6-7년이 엄청 긴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레시맨이라고 하기에는 또 6-7년이 엄청 짧은 시간도 아니다. 햇박사는 준전문가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그런데 또 취업이나 학계에서 준전문가라는 포지션은 너무 이상하다. 준전문가는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경력을 내세우기도, 프레시맨으로서의 발전가능성과 잠재성을 내세우기도 애매하다.
그렇다면 박사 후 커리어를 위한 면접을 볼 때, 어떤 점을 어필해야 할까.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어필을 하면, "이 친구는 대학원 전공말고 다른 건 못하나." 라는 단점이 될 것 같다.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어필을 하면, "이 친구는 대학원 동안 전공 공부를 안 했나." 라는 단점이 될 것 같다. 경력과 가능성, 양쪽의 어필 포인트에는 각각의 단점이 있다.
고등학생이 성인이 되면, 그 진로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본다. 물론 그 당시에는 문과/이과/예체능/특성화 등으로 나뉘어져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다수의 많은 어른들은 20살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학교 졸업생들도 그 진로의 발전 가능성이 넓다. 그 전과는 다른 점은 대학교 졸업장, 대학교에서 얻은 인맥, 대학에서 했던 공부 (이 쪽이 제일 쓸모 없는 듯) 등이 진로에 긍정적인 영향을 제공해준다. 그러니까, 갓 성인이 된 20살이나, 갓 대학을 졸업한 23살이나 모두 신체의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같이, 그 발전가능성이 폭넓다고 본다.
그렇다면 박사과정을 졸업한 햇박사는 성체줄기세포인걸까. 특정 분야를 6년간 공부하고, 그에 대한 전문지식을 지녔다. 박사들의 대부분은 그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서 앞으로의 진로를 정하고는 한다. 그리고 아직 독립연구자나 선임연구원으로 자리는 잡지 못한 상황이다. 분화 가능성은 있는데, 그 폭이 배아줄기세포보다는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성체줄기세포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고는 이전 생각을 조금 고쳤다.
햇박사는 성체줄기세포보다는 iPSC, 유도배아줄기세포같다.
박사는 대학원 학위기간동안 성장을 경험해본 사람이다. 대학원생 말년차가 되면 본인의 특이적인 연구 분야에 있어서는 교수님보다도 대학원생이 더 많이 알고 있고, 전문가가 된다. 나는 대학원 기간동안 단백질을 정제해서 단백질의 열역학적 특성을 위주로 연구(연구1)했다. 그리고 RNA 전사 특이성에 관련된 단백질들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도 연구(연구2)했다. 그리고 사이드 프로젝트로 인간 단백질체에 대한 분석(연구3)도 해보고, 취미 삼아서 단백질 딥러닝 공부(연구4)도 해봤다. 4개 분야에 있어서 모두 적당한 수준의 전문가가 되어본 것 같다. 아마도 오믹스 분석이나, 전사에 관련된 단백질들은 내가 교수님보다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과학철학, 심리학, 뇌과학 등의 수업으로 전공을 채웠다. 그런 나에게 열역학과 단백질이라는 대학원 전공분야는 너무도 낯설었다. 그래서 엔탈피 등을 언급하는 연구1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찌저찌 연구1을 해냈다. 대학원 과정은 "어찌저찌"의 연속인 것 같다. 어찌저찌 교수님의 리드를 따라가다보면, 어찌저찌 모르는 어휘의 논문을 읽다보면, 어찌저찌 실험에 깨지다보면, 어느샌가 어찌저찌 연구1의 전문가가 되어있다.
연구1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끝이겠는가. 나는 연구2의 전문가도 되어야 했고, 연구3, 연구4까지 전문적으로 잘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연구4의 딥러닝은 완전 무지한 분야였다. 하지만 모르는 논문의 분야를 들입다 읽다보면 이 분야의 어휘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 그 어휘들에 익숙해진다는 걸 연구1을 통해서 알았다. 연구1을 수행할 때 실험 물품을 망가뜨리거나 실험 자체를 조져서 하루동안 우울해서 빨리 퇴근해버리고는 했다. 이제는 1분 정도만 우울해하고, 다음 1시간 동안 어떻게 이 사태의 해결법을 숙고한 후에, 행동으로 옮긴다. 연구1에서 100 정도 깨지면서 배웠던 것들을, 연구2에서는 90 정도만 깨지면서 배워나갈 수 있었고, 연구3에서는 80, 연구4에서는 70만 깨질 수 있었다. 나는 대학원동안 여러 연구를 하면서 여러 번 성장했고, 이제는 덜 헤매면서 성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면접을 보내면서 나는 어떤 햇박사가 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고민을 해본 나의 답이다. 나의 햇박사를 성체줄기세포처럼 좁은 분야로의 전문성을 준비했다고 비유하기에는, 햇박사의 성장성과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서는 한 분야의 적당한 경력과 지식을 쌓아 성장하여, 전문가가 되어봤다. 그리고 그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멈춰있지 않고, 다시 멍청한 초기 상태로 돌아가서, 또 다른 분야에서의 성장을 했다. 분화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하면 언제든 다른 세포로 분화하고, 야마나카인자 4개만 넣어주면 배아줄기세포로 돌아가는, 유도줄기세포가 나의 햇박사를 잘 설명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면접을 본다면 내가 대학원시절동안 이런 걸 해봤다는 "과거의 전문성", 또는 내가 앞으로의 회사/연구소에서 이런 걸 잘 할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 두 가지를 어필하지는 않겠다.
대신 "현재의 성장성"을 어필해야겠다. 대학원 기간동안 많이 깨져봤고, 많이 성장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덜 깨져가면서 성장하고 전문가가 되는지 알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시그모이드 생장곡선의 변곡점에 와있다.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가장 다양하게 성장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막말로 나에게 연구가 아닌, 마케팅이라는 상이한 분야를 주어도 빠르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회사/연구소는 이번 면접에서 나를 선발하여, 서로에게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