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지나, 다시 제자리로

by honggsungg labnote

2월입니다. 패딩과 하얀 눈과 더 이상 오지 못하는 교실과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친구들과의 사진과, 이상한 공허감과, 그리고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찬 달입니다. 겨울이 지나 3월이 되면 새로운 학교, 새로운 반, 새로운 친구, 새로운 환경에서 봄을 틔웁니다. 어색한 새로움은 벚꽃과 함께하는 4월과 함께 싱그러워집니다. 그 중 누구는 사랑을 하며 따뜻하고 뜨거운 오뉴월을 맞이합니다. 100일 남짓 지나며 익숙해진 여름은 업무에, 공부에, 동아리에, 친구와 연인에 더욱 열중합니다. 고되고 반복되는 더위와 일상에 지칠 때 즈음에는 추석 연휴가 찾아옵니다. 날씨가 다시 쌀쌀해진다면 수능 시즌이 된 것이겠죠. 세상의 모든 운명이 이 시험 하나로 결정되다니. 고사장에 들어가는 몸이 떨리는 이유는 춥기만 한 건 아닐 겁니다. 그렇게 누구는 대학에 가고, 재수를 하고, 취직을 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며, 연말을 보냅니다. 내년에는 운동을 꾸준히 해야지, 내년에는 연애를 해야지, 내년에는 꼭 취업에 성공해야지, 수많은 새해 다짐을 담은 1월의 해가 떠오릅니다.


멀리서 본 한국 사회는 위와 같이 사계절을 보냅니다. 거시적으로는 비슷한 1년의 타임라인입니다. 개개인에게도 1년의 타임라인은 비슷할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장마와 같이 돌아온 반기보고서, 유독 가족들의 생일이 몰려있는 9월 중순, 새학기라서 길이 유독 3월 초의 출근길, 산타할아버지에게 바라는 올해의 연봉협상 소원, 이런 일들 말입니다. 크게 보면 반복되는 일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번 공전하는 동안, 지구인들은 그 계절에 맞춰, 그 규칙적인 1년이라는 패턴에 맞춰서 생활을 합니다.




지구는 1년 간의 태양 주위의 공전 운동을 걸쳐 공전 궤도 상의 동일한 자리에 다시 위치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틀렸습니다. 현재 지구의 위치와 1년 후의 지구의 위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365.2422 일이라는, 윤년을 포함한 정확한 1년의 공전 주기를 대입해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태양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은하의 팔 한 쪽에 위치한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 있는 블랙홀을 따라 공전합니다. 태양계 자체가 2억 5천만년 주기의 공전을 합니다. 그렇다면 태양계가 우리 은하를 공전하고 난 2억 5천만년 이후에 지구와 태양계는 동일한 위치에 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우주는 끊임없이 가속팽창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은하들은 계속 멀어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주의, 우리 은하의, 태양계의 지구는 끊임없이 다른 위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는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1만년, 1억년, 1조년이 지나도 절대로 동일한 위치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거시적인 지구 수준을 넘어서, 초거시적인 우주 수준에서는 주기와 반복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초미시적인 '나' 수준에서의 1년과 사계절을 생각해봅시다. 1년 전 겨울의 나와 이 겨울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그 때도 논문 작업을 하고 있었고, 24년에는 꼭 출간을 해야지라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아직도 그 논문 작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구실에서 주로 하는 일은 비슷하고, 받고 있는 급여도 동결이네요. 그 때도 분기에 1번씩 모임에 방문했던 것 같네요. 좁은 인간 관계와 낮은 빈도의 사회 활동도 여전합니다. 키와 몸무게도 비슷하고, 아, 작년보다 머리가 조금 길었네요. 아마도 24년 2월에 작성하는 이력서와 25년 2월에 작성하는 이력서는 동일할 겁니다. 이력서에 쓸만한 결과물, 업무 스킬, 급여 변동, 이력서 우측 상단에 붙을 증명사진까지 말이죠. 1년 전의 나와, 한 번의 사계절이 돌아서 다시 맞이하는 지금의 나는 비슷해보입니다.


비슷해 "보입니다" 겉으로 바라본 지금의 나는 1년 전의 나와 비슷해보입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논문 작업부터 말해보죠. 1년 전의 나는 논문 작업을 같이 하는 교수님의 원고만 믿고, 원고에 들어갈 데이터를 제작하는데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안 하면 원고는 나오지 않는다.' 라는 압박, 재촉, 부담으로 내가 처음부터 논문 작성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논문을 10 페이지 정도 작성했습니다. 논문을 작성해보니 교수님의 논문 작성 농도가 왜 그렇게 더딘지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는 10분 동안 한 문장을 쓰고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문단을 완성하면 아주 보람찬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1년 간 여러 실험 스킬도 접해봤습니다. 대전 출장으로는 익숙하지 않았던 실험 장비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 장비를 자주 사용하지는 못해서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어볼 사람이 생겼다는 데에 의의가 있었습니다. 아예 새로 배우는 실험도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의 신뢰도가 낮아서 자주 사용할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지만, 논문에서만 읽어보기만 했던 실험을 익혀서 보람찼습니다.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전혀 사용해보지 않았던, 단백질 데이터베이스를 다루는 능력이 새로 생겼습니다. 데이터 수준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수준으로 분석을 했던 적은 처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에 발맞춰서 인공지능 툴에 대한 팀프로젝트도 마쳤습니다. 좋은 팀원 분들과 프로젝트 후에도 같이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심적으로는 24년의 겨울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찼지만, 25년의 겨울은 잃어버린 여유를 찾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24년 여름의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다시 제 고도에 오르기 위해서 힘든 날들을 보냈습니다. 23년의 겨울은 혼자서도 잘 돌아다니는 사람이었고, 22년의 겨울은 혼자 다니는 게 편한 사람이었고, 21년의 겨울은 편해지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서 매 해 기록하던 짧은 1년 회고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회고에 담긴 매 해의 겨울에는 조금씩 다른 내가 있었습니다.




물론 위에 적은 1년 간의 일들은 이력서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논문은 출간되지 않았고, 새로운 업무 스킬로 이렇다 할 데이터도 내지 못했고, 그리고 제 구질구질한 속마음을 쓸 수도 없으니까요. 글쓰기, 새로운 스킬, 마음 속에서 오는 고통과 희열을 체화하며 지낸 사계절은 이력서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1년 전과 동일해 보이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1년 전과 상이한 경험의 내가 있을 뿐입니다.


1년 간의 나는 계속해서 달라졌습니다. 성장하기만 한 건 아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퇴보하기도, 제자리 걸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만 있던 건 아닙니다. 산에 올라갔다가 다시 동일한 지점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내가 그 시간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 것처럼요. 한걸음씩 올라가면서 헉헉대고, 피톤치드와 가득한 숲내음을 맡고, 정상에서 야호도 외치고, 내려오는 길에 발목도 삐끗하기도 하는 거죠.


지구는 107,000 km/h 로 태양 주위를 공전합니다. 107,000 km/h 는 서울부터 부산까지의 거리를 3초 이내에 이동할 수 있을만큼 빠른 속도입니다. 태양계의 공전 속도와 우주의 팽창 속도는 이 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입니다. 이 미칠듯한 속도의 우주 천체들은 특정한 목적지를 두고서 나아가지 않습니다. 즉, 천체들에게 신을 향한 방향이라거나, 이상적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방향 같은 건 없습니다. 천체들은 힘의 벡터합에 따라서 이동할 뿐입니다. 나를 비롯한 지구의 사람들은 이런 천체들 위에 서있습니다. 나도 이 천체들처럼 항상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나는 공전하는 지구와 같이 사계절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제자리로 왔습니다. 그리고 어디론가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1.

글쓰기 모임에서 사계절/1년 이라는 글감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덧2.

사계절을 뮤비에 담은 김수영의 신곡, "미워했던 날도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어"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FZaHbaW4Q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