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에 대한 내 인상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접했다. 인스타그램 친구의 추천도 있었고, 좋아하는 유튜버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이기도 했다. 나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경로는 이상순의 '완벽한 하루'라는 노래였다. 이상순은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나가는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끼는 완벽한 하루를 노래했다. 그리고 유튜브에는 이 노래와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콜라보한 영상이 있었다. 영상 속 자전거를 타는 중년의 남성과 이상순의 산뜻한 음악이 잘 어울렸다.
그러고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상순에게 아주 큰 배신감이 들었다. 영화는 산뜻하지 않다. 중년 남성은 마냥 행복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러닝타임 내내 노래와 영화 사이의 큰 괴리감에 빠져버렸다.
이 영화에는 딱히 줄거리라고 할 게 없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이웃 할머니의 비질 소리에 일찍 아침을 시작한다. 히라야마는 어차피 더러워질 화장실이지만 매일매일의 청소에 최선을 다한다. 아침부터 시작한 청소는 오후에 끝난다. 일과를 마친 후, 그는 공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작은 가게에서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와서 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이렇게 그의 일상은 반복된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히라야마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보여준다. 히라야마가 직장동료, 공원의 노숙자, 중고서점 주인, 선술집 주인,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조카, 그리고 여동생과 시간을 보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그의 감정 변화를 그려낸다.
그의 일상에는 소소한 행복이 깃들어있다. 화장실에서 울고있던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며 그 아이와 웃으며하던 손인사, 화장실 틈에 끼워진 종이로 얼굴 모르는 누군가와의 틱택토, 나뭇잎과 그 틈 사이로 비춰들어오는 햇빛 사진 촬영, 출퇴근길에 카세트 테이프로 듣는 올드팝, 방 한 켠에서 자라는 작은 묘목들. 이런 행복들과 함께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매일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그의 모닝 루틴부터 잠들기 전까지를 여러 번 반복하여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들 사이에는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어느 날은 직장 후배가 여자친구를 데려온다던가, 어느 날은 퇴근 후에 중고 카세트 테이프 샵을 방문한다던가 하는 차이가 있다. 정말 똑같은 하루가 어디있겠냐 하겠지만, 이 정도면 내 입장에서는 매일 매일 큰 사건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나의 하루는 출근해서 실험하고 점심먹고 엑셀보고 저녁먹고 코드짜고 운동하고 퇴근해서 쇼츠보다 잠에들기. 실험과 엑셀의 내용은 몇 년째 끝나지 않는 동일한 프로젝트이다. 만나는 사람도 매일 똑같은 실험실 구성원들 뿐이고, 다른 사람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히라야마가 주어진 할 일을 다 끝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왜냐하면 대학원생에게는 할 일이 다 끝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에게는 오늘 일의 할당량이 없고, 끝없이 일이 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이 있고, 다음 일이 끝나면 그 다음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은 나와 교수님이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에 상사의 탓을 하기도 어렵다. 그냥 이 업 자체의 특성이 그렇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삶이니 가뿐하지 않은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
히라야마의 조카가 히라야마를 오랜만에 (아마 몇 년 만에) 불쑥 찾아온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조카에게 맞춰 살짝 틀어진다. 조카에게 이부자리를 양보하고, 조카와 함께 화장실 청소 일을 나가고, 과묵한 그가 조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입을 연다. 그러다 히라야마의 여동생이 히라야먀의 조카, 즉, 그녀의 딸을 데려가기 위해 히라야마에게 방문한다. 히라야마는 동생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채 다음 날을 맞이한다.
다음 날, 히라야마는 선술집의 오픈을 기다린다. 히라야마는 선술집의 여주인이 낯선 남자와 함께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엿본다. 그 낯선 남자는 여주인의 전남편으로 7년만에 그녀를 만난다고 했다. 히라야마는 그 전남편과 강변에서 대화를 하고, 그림자 밟기도 하며 그 밤을 보낸다. 영화의 그나마 있는 갈등상황이니까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확인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날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3분 동안 출근길 운전석의 그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그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한다.
혼자 있기만 한다면 외로움을 잘 체감하지 못한다. 외로움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동생과 조카가 방문한 이후에, 히라야마는 그가 가족에서부터 떨어져서 혼자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히라야마가 그 전남편을 만나 각자의 외로움과 그림자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히라야마 본인도 잊고 있었던 본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혼자서 본인의 일과 취미에 충실할 때는 알지 못했던 본인의 감정이었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본인의 감정을 다시금 마주한다.
혼자 살고 있는 히라야마가 우울함과 외로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에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고 취미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일상에 타인이 찾아오거나, 다른 틈이 있는 순간,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침투한다. 히라야마에게 영화의 첫번째 날같은 순간만 계속된다면 그는 잔잔하게 계속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조카가 찾아오기도 하고, 그 전남편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잔잔한 그의 마음에 큰 파고의 일렁이기도 한다.
외로움을 억누르고 일상의 작은 행복으로 살아가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보면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양가적인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외로움을 억누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너무 안쓰럽고 슬프고 암울했다. 반면, 겉으로 표현되는 히라야마의 일상은 작은 행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희망차고 산뜻한 느낌도 있었다.
그의 일상이 너무 단조롭기 때문에 중립적인 감상이 드는 게 아니었다. 그의 일상에 숨어있는 외로움과 행복이라는 양극단의 감정이 합쳐져서 중립적인 감상이었다. 일상이 단순하고 반복적이라고 해서, 그가 느끼는 감정 또한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今度は今度、今は今. 나중은 나중, 지금은 지금.
히라야마가 조카와 함께 다리에서 자전거를 타며 서로 주고받는 대사이다. 이 강을 따라가면 바다가 나오냐는 조카의 질문에 히라야마는 그렇다고 답한다. 바다에 가보자는 조카의 요청에 히라야마는 나중에 가자고 한다. 그러니까 그 나중이 언제냐고 되묻는 조카에게, 히라야마가 위 대사를 말한다.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
히라야마는 조카에게 그 나중을 특정지어주지 않는다. 조카에게 언젠가는 바다에 갈 수도 있겠지? 하는 미래에 대한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지 않는다. 대신에 지금은 지금이라며 히라야마와 조카는 강 위에서 같이 자전거를 탄다. 미래에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바다 대신에, 현재에 확실히 닿을 수 있는 강에서 같이 지금을 즐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히라야마의 삶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방식은 히라야마의 삶이다.
덧 1.
언젠가 이 영화를 봐야지...하며 미루고 있다가 겨우 영화를 관람했다. 24년 12월에는 재개봉 영화인 퍼펙트 데이즈를 상영하는 극장이 하나밖에 없었고, 내 일정상 금요일 심야 시간대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 날 금요일 오후부터 퇴근까지 내가 주도하는 미팅이 있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미팅 자료를 마무리하고, 스크립트를 제작했다. 프로젝트를 요약하는 스크립트를 제작했는데,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을 잘 했다. 미팅에는 내가 주도하는 2개 프로젝트의 경과를 150 슬라이드로 준비했고, 3시간 동안에는 프로젝트1에 해당하는 70 슬라이드를 발표했다. 프로젝트2까지 모두 발표해버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다음주까지 내가 발표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래도 교수님과 연구원들의 나름 좋은 피드백이 있어서 보람찬 미팅이었다. 그간 미팅 준비를 하느라 퇴근이 늦어서 금요일은 퇴근을 일찍했다.
퇴근하자마자 미용실에 가서 덥수룩한 머리를 잘랐다. 눈썹이 다 보이도록 앞머리를 짧게 잘라서 어벙벙한 학생같은 머리스타일이 되었다. 나름 어려보이는 머리스타일이라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는 윤셰프라는 집 근처의 중식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의 리뷰가 좋기도 했고, 요 며칠간 간짜장이 너무 먹고 싶기도 해서 이 식당에 들어갔다. 이 날 추워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역시 중식집이라서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좋은 기분은 맛있는 간짜장으로 계속 이어졌다. 춘장의 탄맛과 살짝 매콤한 불맛도 적절히 나면서 고기의 쫄깃한 식감과 양파의 익힘 정도도 좋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길에 있던 슈퍼에서 2개 천원짜리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붕어빵 냄새에 이끌려 나는 천원어치 붕어빵을 샀다. 주인은 되게 뚝딱거리면서 붕어빵을 만들고 있었고, 나한테 2개를 주면서, "이것들 식어가지고 1개 더 가져가셔도 돼요" 하면서 하나 더 넣어주셨다. 나는 붕어빵 3마리와 함께 차에 탔다. 차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고, 존박과 김수영 노래를 블루투스로 틀었다. 이제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여유롭게 올림픽대로를 운전할 수 있다. 한밤의 올림픽대로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그 뒤의 건물들의 불빛이 참 아름다웠다. 그렇게 영화관에 도착해서 <퍼펙트 데이즈>를 관람했다.
<퍼펙트 데이즈>를 관람하지 않아도 됐을 것 같다. 이게 완벽한 하루다.
덧 2.
그런데 이 영화가 일주일만에 넷플릭스에 올라왔다니... ㅋㅋㅋ 넷플릭스에 올라오면 언제든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또 미뤄뒀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본 건 잘한 일이었다.
덧 3.
영화에 나오는 도쿄 화장실이 엄청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