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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P 과학자, 홍성랩노트입니다. (3)

P 편. Physical chemistry, 물리화학.

by honggsungg labnote

'물리화학'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니면 '물리' 또는 '화학'은 어떤가요?


일상에서 '물리'라는 단어는 무기를 사용하여 위해를 가할 때, '물리적 공격'같은 맥락에서 자주 사용된다. 일상에서 '화학'이라는 단어는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유해 화학 물질'이라는 맥락에서 자주 사용된다. 일상에서 물리와 화학을 붙여서 말하는 경우는, 이과 고등학생이 과학 탐구 영역을 물리와 화학을 선택하는 경우 말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물리와 화학은 너무 어려운 탐구과목이기 때문에, 물리화학 선택자는 극상위권 학생이거나 가오에 미친 학생이다. '물리'와 '화학'은 일상생활에서 쉽지 않은 상황에 주로 쓰이는 어휘이다.


일상 생활이 아닌, 저명한 화학 저널(JACS)은 물리화학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물리화학은 화학적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원리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 분야는 다음을 연구합니다. 물질이 분자 및 원자 수준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화학 반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물리화학자들은 원자와 분자의 물리적 성질, 화학 반응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이러한 성질이 드러내는 정보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이들의 발견은 화학적 성질을 이해하고 이를 물리학 이론과 수학적 계산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데 기반을 둡니다. 물리화학의 주요 연구 분야는 열역학(thermodynamics), 반응속도론(kinetics), 분광학(spectroscopy), 양자화학(quantum chemistry),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 등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물리와 화학이라는 어휘의 쓰임새와, 저명한 화학 저널에서 말하는 물리화학의 정의를 알아봤다. 일상생활의 물리와 화학은 위험하고 도전적인 느낌이 들고, 저명한 화학 저널의 물리화학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 물리화학은 위험하고 도전적이고 어려운 연구분야이다. 실험하다가 굉음이 터지거나, 불꽃에 휩싸이는 그런 위험이 아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머리를 쥐어 뜯고 정신이 나가버리는 위험이 도사리는 연구 분야이다. 그리고 이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물리화학이 어떤 학문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날은 물리화학이 이해가 되었다가도, 잘 모르겠고, 이게 맞는지 다시 또 의심하는 분야이다.




물리화학의 애매한 설명은 뒤로 하고, 세부 학문 분야로 들어가서 물리화학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해보자.


열역학 (Thermodynamics)

열역학은 열과 에너지,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변화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SF에서 자주 언급되는 엔트로피(entropy, 자유도)가 열역학에서 연구하는 인자이다. 운동 후에 흘리는 땀이 일상의 열역학의 한 예시이다. 땀을 흘리고 가만히 있으면 땀이 증발하면서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액체인 땀이 기체로 증발하면서 열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증발이라는 화학 반응에서 에너지가 변화하고, 이런 에너지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열역학이다.


나는 열역학을 단백질 스케일에서 연구한다. 단백질이 결합하거나 분해할 때 발생하는 열을 측정하며, 단백질이 다른 단백질과 결합하면서 감소하는 엔트로피를 계산하며, 열과 에너지를 기반으로 단백질의 결합 반응이 자발적으로 일어날지를 예측한다. 단백질 수준의 열역학은 단백질과 약물이 과연 생체 내에서의 결합 여부를 예측하는 데에 중요하다.


반응속도론 (Kinetics)

반응속도론은 화학 반응의 속도와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말 그대로 어떠한 화학 반응이 빠르거나 느린지 연구하고, 어떤 촉매를 이용하여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지 연구한다. 냉동실의 낮은 온도가 일상의 반응속도론의 한 예시이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10도 낮아질수록, 반응 속도는 2배 감소한다. 상온이 20도이고, 냉동실은 상온보다 40도 낮은 -20도이므로, 반응 속도는 16배 정도 감소한다. 즉, 냉동실에서는 음식물이 상하는 화학 반응이 상온에서보다 16배 느리게 일어나고, 느린 반응속도로 인해 더 오래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다.


나는 반응속도론을 단백질 스케일에서 연구한다. 단백질이 결합하거나, 효소 반응이 일어나는 속도를 측정한다. 화학 반응 속도가 어떤 인자들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수식을 세운다. 단백질이 한 번 결합할 때 오래 결합하는지, 아니면 짧은 시간의 결합을 여러 번 하는지를 알아본다. 단백질 수준의 반응속도론은 약물 투여 시에 과연 얼마나 빠르고 안전하게 전달되는지 알아보는데에 중요하다.




양자화학 (Quantum Chemistry) 은 양자역학 원리를 화학 시스템에 적용하여 원자와 분자의 구조와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통계역학 (Statistical Mechanics) 은 미시적 입자들의 통계적 행동을 통해 거시적 열역학 현상을 설명하는 분야이다. 분광학 (Spectroscopy) 은 물질과 전자기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여 물질의 구조와 조성을 분석하는 분야이다. 3개 분야도 실험실에서는 자주 쓰이는 분야인데, 실생활에서는 딱히 이렇다할 예시가 떠오르지 않는다.


핵자기공명법이라는 분광학의 한 기법이 있다. 외부의 자기장을 단백질 시료에 가하면 단백질 내의 여러 원자핵이 스핀 방향에 따라 에너지 상태가 나뉜다. 이 때, 핵의 스핀과 에너지 상태는 양자화학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탄소 원자핵이 주변에 다른 원자 또는 전자와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서 다른 에너지 상태가 나타난다. 에너지 상태를 기반으로 여러 형태(conformation)의 단백질을 유추할 수 있다. 단백질의 여러 형태의 집합을 단백질 구조 앙상블이라고 하며, 이 앙상블은 통계역학에서 다루는 개념이다. 분광학, 양자화학, 통계역학을 통합하는 핵자기공명법으로 단백질의 형태에 대해 연구한다.




단백질을 연구하는데 어려운 물리화학 분야를 꼭 해야 하나?

물리화학이 무슨 학문인지, 그리고 나는 물리화학으로 어떤 단백질 연구를 하는지 소개했다. 나에게 물리화학은 단백질이라는 화학물질의 물리적인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시점에서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자. 단백질을 연구하는데 어려운 물리화학 분야를 꼭 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아래와 같다.


물리화학이 아니면 단백질을 알 수가 없다.

하나의 단백질을 한 명의 사람이라고 비유해보자. 예를 들어, 소개팅에서 상대방을 처음 만나면, 당연히 키, 얼굴, 피부같은 외모부터 볼 수 밖에 없다. 우선 외모만으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일지 대략적으로 유추한다. 그 다음에 대개는 회사나 학교같은 사회적 소속을 밝히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얘기를 한다. 일 말고 다른 취미 생활이나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MBTI 도 꺼내면서 본인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더 나아가서 본인의 연애 가치관은 어떤지 이야기한다. 불같은 사랑을 하는 타입이라던가, 한 사람과 오래 만난다던가, 본인을 구속하지 않으면 좋겠다던가 같은 내용들 말이다.


단백질의 구조는 사람의 외모와 비슷하다. 단백질의 구조로 그 단백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관상을 보면 싸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외형만 봐도 직업을 대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이 부분은 지난 에서 언급을 많이 했으니 금방 넘어가자.


단백질의 기능은 사람의 직업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생명과학 연구에서 어떤 단백질을 연구할 때 그 단백질을 세포에서 없애거나, 세포에서 과발현시킨다. 그 단백질이 없을 때는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그 단백질이 많아디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본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퇴사를 하면 그 사람이 직장에서 하던 업무가 마비되고,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반대로, 동일한 포지션의 사람을 3명 더 고용하면, 훨씬 원활해지는 업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단백질의 물리화학적 특성은 사람의 성격과 비슷하다. 단백질의 물리화학적 특성은 겉으로 한 번에 보여지지 않는다. 단백질을 오래 분석하고, 많은 검사를 해봐야 이 단백질의 특성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사람의 가치관을 물리화학적인 특성으로 치환해보자. 불같은 사랑을 한다는 특징은 열역학에서 큰 규모의 엔탈피를 의미하고, 한 사람과 오래 만난다는 특징은 반응속도론에서 낮은 koff 를 의미한다. 구속하지 않는 특징은 통계역학에서 하나의 깊고 좁은 에너지 앙상블이 아닌 넓고 얕은 에너지 앙상블을 의미한다. 단백질에게 MBTI 같은 성격 검사가 바로 단백질의 물리화학적 접근법이다.


그 사람의 외모와 직업만을 가지고 고정관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해도 맞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사람을 정말로 알고 싶으면 더 오래 대화하고, 많은 시간들을 같이 보내야 한다. 상대를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도 복잡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단백질의 물리화학적인 접근법으로 단백질을 하나하나 뜯어봐야 이 단백질이 도대체 어떤 단백질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번 편은 적당한 그림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림이 없네요)




덧, 짧은 MBTI 이야기 - P

과학 실험과 연구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맨날 성공하던 실험이 갑자기 실패하기도 하고, 잘 작동하던 기계가 고장나기도 하고, 교수님이 급한 사정으로 출근하지 않기도 한다. 계획에 없던 이런 사건들이 생기면 스케줄이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3시간동안 해야할 일이 사라지기도, 갑자기 생겨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변경된 실험 시간에 맞춰서 실험을 다시 시도하거나, 논문 작업을 추가로 진행하는 등의 새로운 스케줄을 잡아야 한다. 대학원생에세는 뭘 해야 할지 얼타고 있을 시간 따위 없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해야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계산하여, 그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내가 세웠던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가장 큰 문제다. 스케줄이 망가지는 문제는 귀여운 수준이다.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면, 우선 실험 방법 상에 문제가 있었는지, 데이터 해석에 문제가 있었는지, 검토를 해본다.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또다른 실험을 했을 때에도 결과가 이상한지 확인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설 자체를 뒤집어야 하는 멘붕에 빠진다. 가설을 뒤집는다는 의미는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갈아엎는다와 비슷하다. 이런 문제를 맞닥뜨리면 하루 정도만 멘붕에 빠지고,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를 돌아보면서 그나마 얻어낼 수 있는 정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굴려서 새로운 가설을 세운다.


업무는 계획적으로, 마인드는 즉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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