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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식 집단 심리 상담 <썬더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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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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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맥주를 두 잔을 마시고 봐서 그런가. 즉흥적으로 계획에 없던 일을 해서 그런가. 최근의 마블 행보와 <썬더볼츠*>에 출연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큰 기대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썬더볼츠*>의 캐릭터들에 내가 크게 이입을 해서 그런가. 정확하게 딱 떨어지는 이유를 찾지는 못 했지만, 이 영화는 정말 최고였다. 단숨에 올해의 영화로 등극했다. 올해 초에 관람한 <서브스턴스>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와서, <서브스턴스>를 올해의 영화로 올릴까 했다. 하지만 이를 뛰어넘는, 감동, 재미, 액션을 모두 잡은 마블 영화가 돌아왔다. (이렇게 써놓으니 흔하디 흔한 영화 홍보 문구같네) 하반기에 다른 큰 일이 없다면 <썬더볼츠*>가 올해의 영화가 될 것이다.


나는 마블 영화를 좋아한다. 음... 좋아했다. 2019년 엔드게임 이전에는 마블 시리즈를 빠짐없이 챙겨봤다. 영화관에서 못 본 영화들은 네이버 영화로 집에서 다 챙겨봤다. 그렇게 타노스가 I'm inevitable 을 외치고, 아이언맨이 I am iron man 을 외치면서 마블 10년 간 여정의 1막이 내렸다. 엔드게임 이후에 남아있는 히어로들과 팬들을 위해서 마블은 새로운 2막을 열고 있다. 팬의 입장에서 엔드게임 이후, 2막의 영화들도 보고는 있긴한데, 이번에는 모두 챙겨보고 있지는 않다. 스파이더맨 2 파 프롬 홈, 블랙 위도우, 이터널스, 스파이더맨3 노 웨이 홈,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3, 그리고 <썬더볼츠*>까지 6편을 봤다. 그동안 개봉한 영화와 드라마는 3배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만큼만 봤다. 디즈니 플러스로 드라마가 나오면서 이해 해야할 게 많아지고, 그만큼 캐릭터 사이의 관계성과 세계관은 복잡해지고, 게다가 매력없는 PC가 묻으니 오락성 자체도 감소하고, 그저 그랬다. 2막에서 봤던 영화들 중 최악은 <이터널스>. 앞서 말한 3가지 이유가 다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파이더맨 3 - 노 웨이 홈>은 3스파이더맨으로 추억을 소환시키며, 2021년의 홍성 올해의 영화로 꼽았다. 또한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3>도 감동적인 로켓의 서사를 그려내며, 박수치며 원래의 캐릭터들을 떠나보냈다. 새로운 2막 캐릭터를 입장시키기 위해서 마블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관객들은 1막의 퇴장에만 박수를 칠 수 있었다.


<썬더볼츠*>는 확실히 다르다. 박수치며 마블의 2막 캐릭터를 입장시켰다. 이 영화에는 엔드게임 이전 1막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2막에는 등장하는 캐릭터가 다섯이나 등장하며,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밥)도 하나 있다. 캡틴 아메리카의 친구이자 아이언맨의 원수인 윈터솔져 버키 빼고는 다 익숙치 않은 캐릭터다. 메인 주인공인 옐레나와 그의 아버지 역할인 레드 가디언은 <블랙 위도우>에서, 고스트는 앤트맨 시리즈에서, 존 워커는 캡틴 아메리카 드라마에서, 발렌티나는 2막의 여러 드라마와 영화의 쿠키에서 등장한다. 이 모든 캐릭터에 대해서 알고 이 영화를 보면 좋다. 그렇다고 그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모두 시청하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고, 천재 이승국의 유튜브 정도만 보면 <썬더볼츠*>의 감동과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벤져스가 사라진 세상, CIA 국장 발렌티나는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여러 생체 실험과 악행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그녀의 비밀 벙커에서 소각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옐레나, 존 워커, 고스트는 비밀 벙커 내부에서 발견된 밥과 함께 힘을 합쳐 벙커를 탈출한다. 벙커를 탈출하면서 밥은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새로운 영웅으로 태어나는데...


https://youtu.be/7MRnLqgaLPM?si=epjG0dRZ7QnKeVMb




이제부터 아래는 스포와 함께하는,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3가지이다. 살아있는 마블식 유머, 꿈같은 연출 기법, 평범한 인물의 히어로물.


우선 나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제목을 몇 개 꼽자면, 일본 가족 좀비 영화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대체 역사 영화인 "바스타즈: 거친 녀석들"이 있다. 이 영화들은 가족 영화와 2차대전 영화라는 메인 장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유머가 정말로 뛰어나다. 감동적이고, 계속 골똘히 생각하게 만들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좋은 영화의 기준에는 유머가 필수적이다. 그저 그런 코미디 영화는 진지한 영화보다 제작하기 쉬울 수도 있겠지만, A급 코미디 영화는 A급 진지한 영화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내가 그간의 마블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마블은 히어로 영화이면서, 그 기저에는 마블식 코미디가 은은히 깔려있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의 가벼운 농담(너 엄마가 커튼 입고 나온 거 아시니?, 토르를 보면서.) 캡틴 아메리카의 옛날 사람 순간들(전기로 작동하나봐!, 수많은 전선을 보면서.) 브루스 배너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고학력자 농담(나는 7개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 가오갤의 나사빠진 행동들(죽어라! 죽음의 담요야!, 스트레인지의 담요와 싸우면서.) 닉 퓨리의 흑인 바이브(motherf...) 이런 것들 말이다.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의 유머를 잘 계승했고, 완다와 비전도 드라마에서는 유쾌한 시트콤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영화 <썬더볼츠*>의 대폭소 유머 버튼은 단연코 레드 가디언이었다. 레드 가디언이 하는 모든 행동과 대사가 전부 다 재미있었다. 레드 가디언은 소련 버전의 캡틴 아메리카로, 그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큰 박수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퇴출되어버렸다. 지금은 집에 짱박혀서 배달음식이나 먹고, 가끔 있는 리무진 기사 일이나 하는 방구석 백수가 되어버렸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다시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이 영화에서 레드 가디언이 무언가 터뜨리고, 액션을 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행동을 하고 난 뒤에 그가 짓는 뿌듯한 표정이 너무 웃겼다. 버키와 슈퍼 혈청의 제조지를 묻는 대사, 썬더볼츠*의 후원사를 두고 떠올리는 대사나, 저작권에 걸리지 않게 어벤저즈 티셔츠를 제작했다는 대사 자체도 너무 웃겼다. 러시아 억양의 영어로, 어딘가 모자른 것 같은, 하지만 그 뛰어난 열정이 보이는, 레드 가디언의 캐릭터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중반부에 "옐ㄹㄹㄹ레나아아아!!!!" 하고 리무진을 몰고 오는 레드 가디언의 모습이 웃음 킬 포인트.


레드 가디언 말고 옐레나의 냉소적인 농담들. "그래, 누가 의미 없는 옛날이야기 잘하나 대결하는거야? 나는 5살 때 썬더볼츠라는 축구팀에서 뛰었고, 맨날 꼴찌했어. 그 중에는 경기 중에 응가한 애도 있었어. 자 다음 사람." 밥의 순수한 태도에서 나오는 대사들. "오이! 오이! 오이! 나는 재채기가 나오기 전에 오이라고 외치거든." 워커, 고스트, 버키가 툭툭 던지는 대사들도 실소를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꿈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꿈이 아니라 잠에 들면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꿈. 내가 10년간 가장 좋아했던 영화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자고 있는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주인공이 빌런으로부터 숨바꼭질하는 영화이다. (줄거리 요약은 대충만 맞음)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의 파편 속을 돌아다니기에, 이 기억에서 저 기억으로 뛰어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낙엽 속에 파묻힌 것 같다가도 눈을 뜨면 침대에 있고, 비 오는 거리에 있다가도 싱크대 위에 있고, 도서관 문을 열였는데 진료 센터가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CG 처리되지 않고, 아날로그 방식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그 투박함에서 나오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리고 이터널 선샤인을 제치고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 1위로 등극한 영화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에올)>이다. <에에올>은 주인공이 멀티벌스를 넘나들며 딸래미를 데리고 무사히 세금 신고를 하는 영화이다. (이 줄거리 요약도 대충만 맞음.) 이 세계관에서 라따뚜이구리 세계관으로 넘어간다던가, 화양연화, 소시지 손가락, 돌맹이, 쿵푸마스터 세계관에서 그 능력을 바로 바로 적용한다.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은 굉장히 화려하게 연출된다. 총이 갑자기 꽃가루 폭죽으로 바뀌거나, 화려한 영화 시사회 뒷풀이 자리로 바뀌는 방식이다. 과도하게 발산하는 에너지의 공간 전환은 관객의 정신을 쏙 빼놓게 만든다.


나는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비현실적인 장면 전환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비현실적인 장면 전환은 꿈에서 자주 나타난다. 꿈 처음에는 골목길을 걷고 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꿈의 다음 장면은 잠수함 내부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꿈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그 장면 전환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공간 전환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썬더볼츠*> 영화의 후반에는 흑화한 밥이 등장한다. 태양의 천배의 힘을 가지고 흑화한 밥은 공허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밥은 부모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항상 혼자라는 마음을 가졌고, 성인이 되어서는 마약과 우울에 빠져살았다. 스티브 로저스같은 선한 인물이 슈퍼혈청을 투여 받았기에 그는 캡틴 아메리카가 되었다. 하지만 밥같은 약한 인물이 슈퍼혈청을 투여 받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밥은 공허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들을 그림자로 검게 물들이며 공허로 보내버렸다. 옐레나도 밥의 공허로 빠져들어갔다.


밥의 공허는 각자의 어두운 내면을 보여주었다. 옐레나는 그녀의 첫번째 킬러 미션을 했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옐레나는 아무리 언니를 살려보려해도 살릴 수가 없었고, 그 기억에서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끝나지 않는 쇼츠처럼 계속 반복 재생되었다. 발버둥 끝에 기억이 재생되는 세트장의 문을 찾아서 열었더니 옐레나는 천장에서 떨어졌고, 선생님에게서 채찍을 맞던 기억의 방에 도착했다. 그 기억의 방에서 거울을 깨보니, 화장실 물 웅덩이에서 올라왔고, 욕조 앞에서 죄책감과 술에 취해있는 옐레나가 있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방을 헤매다가 옐레나는 밥을 만났다. 밥도 다락방에서 홀로 있는 외로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밥과 옐레나, 썬더볼츠 멤버들은 밥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의 방까지 하나씩 나아갔다. 그리고 그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 끝에는 "결국 혼자"라고 말하는 공허의 밥이 있었다. 썬더볼츠는 공허의 밥에서부터 밥을 떼어내며, 밥을 구원한다.


썬더볼츠가 밥의 공허로 들어간 이후, 이 영화의 절정 지점에는 액션이 없다. 일반적인 히어로 액션 영화라면 클라이맥스에서 최대한의 액션과 눈뽕 가득한 CG와 함께 장대한 결투를 하지만, 이 영화는 이전에 보여준 액션이 전부다. 이 영화의 절정에는 상대와의 격정적인 전투보다 우울한 내 기억과의 격정적인 싸움이 있다. 자기 전에는 수치스럽고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들만 반복 재생된다. 그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에서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면, "떠오르고 싶지 않은"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서 또 다른 불쾌한 기억으로 빠져든다. 그런 부정적인 기억들은 왜 그렇게 자주 뭉쳐다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자주 떠오르는 건지. 영화에서는 각자의 불쾌하고 우울한 기억들 사이를 아픈 방식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천장에서 떨어져야 했고, 거울을 깨부셔야 했고, 물에 몸이 젖어야 했고, 커튼에 목이 졸려야 했고, 광고판에 맞아야 했다. 아픈 방법으로는 그 다음 우울한 기억으로만 갈 수 있었다. 우울한 기억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의 정서적인 안정감으로 가득찬 포옹이 있어야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나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까 언급했던 <에에올>은 별 볼 일 없던 세탁소 아줌마였던 주인공이 히어로로 각성하며 빌런을 처리한다. 2021년 올해의 영화였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초등학생 때부터 한 편도 빠짐없이 봤다. 애초에 마블 시리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는 거겠지.


사실 히어로 영화라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는 모두 히어로가 아닐까. 오랜 역경을 버티고 버틴 후에 히어로로 재탄생할 날을 기다리는 히어로. <오펜하이머>, <말아톤>, <세 얼간이> 등등 개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주인공의 내면과 성장을 다루는 영화는 모두 넓게 봐서 히어로 영화로 포함시키고 싶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마블을 좋아했던 이유가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히어로도 사람이야. 아이언맨이 괜히 허세 넘치는 자랑을 하고, 스파이더맨을 잃은 아픔에 슬퍼하는 모습에 공감한다. 스타로드가 옛날 음악에 빠져 헛소리를 하고, 수많은 장난과 농담을 하는 모습에 공감한다. 스파이더맨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찌질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공감한다. 세계 평화같은 거대한 문제들은 차치하고, 내 주변의 이웃, 친구,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쿠키 영상 중 하나는 어벤저스 멤버들이 전투 다 끝내고, 그 코스튬 그대로 케밥 먹는 영상이지 않을까.




마블의 1막에서는 닿을 수 없이 대단한 히어로들의 평범한 고민이 보였다면, 마블 2막의 시작인 <썬더볼츠*>에서는 내 주변에서 있을 것 같은 히어로들이 평범한 고민들을 한다. 주인공 옐레나는 킬러로, 아파트 1평 남짓한 화장실에서 술 먹고 우는 날이 많다. 레드 가디언은 뚱뚱보 아저씨로, 어질러진 방 안에서 나초랑 배달음식이나 먹고 있다. 존 워커는 평범한 집의 가장이었지만, 캡틴 아메리카에서 해임된 후로 아내와 아이는 따로 살고 있다. 버키는 하원 의원인데, 집에서는 서류에다 토마토 소스 흘리면서 식세기에 로봇팔 청소하며 지낸다. 이 히어로들이 평범하다는 특징은 어벤저스 타워 앞 도보에서 말 싸움하고 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주변 행인들이 그들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휙휙 그냥 걸어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나름 실력 있는 킬러이고, 슈퍼 솔져이다. 하지만 아무도 날지도 못하고, 최첨단 장비도 없고, 세계관 내에서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인기도 없다. 그들은 1군 어벤저스를 보면서 '와 개쩐다...' 하는 2군 멤버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들도 출근하고, 퇴근하고, 상사(발렌티나)한테 한 소리 들으면서, 하기 싫은 일하며 돈을 번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건강한 정신으로 회복할 여유도 없고, 그러니 싸구려 패스트푸드나 술로 인스턴트 인생을 견뎌나간다. 가끔 정신을 차려서 본인의 삶을 돌아보면, 도대체 이게 뭐하는 건가 싶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며 떨어진다. (오프닝 시퀀스는 옐레나가 빌딩에서 추락하는 씬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냥 정신없이 자신의 감정들은 미뤄둔 채로 다시 억지로 일상을 살아간다.

밥: 외롭거나 불안하다고 느껴지면 어떻게 해?
옐레나: 그 감정을 꾸겨서 저 아래에 밀어넣고, 그 다음 일을 하는 거지.


그런 맥락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장면은 센트리한테 쳐맞고서 각자 뿔뿔이 흩어진 후에, 옐레나가 레드 가디언한테 울면서 짜증내고 칭얼대는 장면.

나는 그냥 매일 일하고, 또 일을 할 뿐이야. 일을 하고서는, 내가 한 몹쓸 일을 떠올려.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그렇게 돈을 벌고, 다시 일을 하고, 다시 내가 했던 몹쓸 일을 되새겨. 그리고 나 혼자 뿐인 집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하고, 술을 마시고서, 다시 그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고, 또 죄책감에 시달려. 나는 이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왜 그동안 연락 한 번이 없었어!




썬더볼츠는 각자의 마음 속에 어두움이 있다. 언니 없는 자식, 한 물 간 1940년대 전쟁영웅, 정치가로 전락해버린 군인, 해임된 캡틴 아메리카, 악당짓하던 킬러. 그들은 모두 팀 없이, 혼자 일 한다. 혼자일수록 우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기만 한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의 우울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고 외로운 현대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결국 히어로 영화인 이유는 그들이 히어로로서 우주적 빌런을 해치우기 때문이다. 썬더볼츠에게 있어 가장 큰 빌런은 우울하고 외로운 내면의 자신들이다. 우울이라는 빌런의 소굴 한가운데에 있던 그들은 발렌티나 때문에 한 공간에 모여 갑자기 팀이 되어버린다. 혼자였던 그들이 협동을 해야하니, 삐걱대는 건 당연했다. 그 삐걱대는 중에 그들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각자의 외로움과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리치기도 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솔직하게 얘기를 하다보니, 그동안은 잘 알지 못했던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며, 혼자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그리고 그들은 밥이라는 커다란 문제아를 다같이 안아주면서 썬더볼츠 스스로가 위로를 받는다.


내면의 우울한 자신이라는 빌런을 모두 소탕해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히어로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이 글에서 영화 제목, <썬더볼츠*> 쓸 때, 항상 별표를 붙이고 있다. 영어에서 별표는 뭔가 수정할 부분이 있을 때 사용한다. 즉, 5살짜리 축구단 이름인 썬더볼츠였던 그들은, 영화의 결말에서 뉴 어벤져스로 재탄생한다. 옐레나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레드 가디언은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있지 않게 되었으며, 존 워커는 캡틴 아메리카는 아니지만 다시 히어로로 복귀했고, 고스트는 더 이상 유령처럼 숨지 않아도 되었으며, 버키는 단순한 사이드킥으로만 남지 않게 되었다. 아주 성공적이고 모두가 인정하는 빌런 퇴치와 뉴 어벤져스로의 인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멘탈 케어와 히어로로서의 첫걸음이었다.




마블식 집단 심리 상담, 현대인의 멘탈 치유 드라마, 루저들의 트라우마 극복 이야기. <썬더볼츠*>


졸업과 논문의 기약이 없는 대학원생 6년차, 내가 <썬더볼츠*>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이유는 이 지점이었다. 혼자였던 그들이 공동체에서 본인과 타인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나는 영화 초반 옐레나가 밥에게 했던 말처럼 외로움과 불안함을 모른 체하고 일이나 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옐레나는 밥에게 그 말을 취소하겠다고 소리친다. 그 말은 밥에게 하는 말일 뿐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현 시점에서 내가 가장 필요한 점은 졸업도, 논문도 아니라 작은 공동체에서 오는 정서적 안정감과 유대감이다.


코미디를 기저에 깔아놓은 각본, 일상적이면서 비현실적인 연출, 정서적 불안함을 건드리는 연기. 3박자가 모두 어우러진 좋은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모두 갖춘 이 영화를 좋아할 수 밖에.




+ 물론 액션과 음악도 뛰어나다.

+ 영화가 끝나고서 바로 영화 리뷰를 작성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 정서적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 거지같은 대학원을 얼른 때려쳐야지.

+ 글을 쓰면서 이 영상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WsfGnwfe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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