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느낌이 들 수 있게
내가 해줄 수 없는 일들은 빠르게 거절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오히려 내가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에 대한 거절은 너무 어렵다. 내가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상처와 내가 거절함으로써 주는 상대에 상처의 경중을 가늠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탁과 거절에 서로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상처의 차이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당연히 별생각 없이 부탁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소중한데 굳이 고생하고 상처받으면서 부탁을 들어줄 필요는 없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다만 뭔가 부탁하는 상대도 충분히 고민 후 요청했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어 선택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예전에는 거절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었다. 정확히는 거절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상대가 부탁하면 내가 조금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순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줬었다. 뭔가 내가 거절하지 않고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상대에 좋은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는 생각과 나중에 뭔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상대의 부탁도 들어줬던 것을 보면,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괜히 상대에 기대하고 혼자 상처를 받으며 나도 변했다. 타인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그때부터 거절이 훨씬 쉬워졌다. 지금은 내가 제일 중요해서, 항상 부탁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을 먼저 한다. 정말 필요한 부탁인가, 내가 상처받을 일은 없나, 부탁한 사람이 내게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 거절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부탁을 들어주고 배려해줄수록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만 곁에 두려고 한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변했어도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때마다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개인적인 것을 떠나서 쉽게 거절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른을 공경하고 시키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 부탁은 들어줘야한다는 어릴적부터의 주입식 교육. 부탁은 긍정이, 거절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 교육 문화였다. 나는 거절하는 방법에 대해 배운 기억이 없다. 대학교 선배와 직장에서 상사의 업무 부탁과 회식, 술자리 참석, 지인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전부 그러한 문화가 변질되어 사회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고, 최근 사회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고는해도 여전히 이런 문화는 남아있다.
그래서 매우 부정적인 느낌 가득한 거절이라는 것을 긍정적인 느낌이 들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국사회 분위기를 바꿔나가는 것도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사회적 책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회 분위기 변화의 시작점이자 중심에 있다. 거절의 무게가 무거운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쉽고 올바르게 거절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다. 무조건적인 거절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합리적인 거절. 좋은 느낌의 거절이 사회 곳곳에 퍼질 수 있게. 모두가 거절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