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ㅇㅇ님 안녕하세요.
어떻게 저의 메일 주소를 아시고, 반가운 메일까지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답신 기다리셨을텐데, 이렇게나 많이 늦어져서 죄송해요.
제가 새벽까지 일을 하고,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퇴근하면 늘 피곤에 절어 있거든요.
그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대충 답할 수는 없는 내용이라, 틈틈이 생각을 정리해서 조금씩 적다보니 이제야 회신드립니다.
ㅇㅇ님께서 애정을 가지고 봐주셨던 저의 지난날의 인터뷰는 수 년 전, 정확히는 2021년 말~2022년도 초입, 제가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해 무작정 동해바다 7번 국도로 도망쳐 풍찬노숙하던 시절에 촬영된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컨션스9’이라는 노숙인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고작 스물 넷밖에 안 된 어느 노숙인 청년의 인터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시고,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삶을 거의 포기한듯 보였습니다.
저의 스물 넷이 생각났습니다. 당시의 저 또한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하셨고, 연이어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직 삶이 끝난 것이 아닌데, 왜 그 청년은 어딘가 한 구석이 죽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저는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컨션스9으로 직접 연락했습니다.
그 친구를 비롯하여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워하는 분들께 제가 쓴 책을 선물한다든지 아무튼 무언가 힘이 되는 얘기를 좀 하고 싶다, 그렇게 인터뷰를 요청드리니 컨션스9에서 저를 찾아와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당시 빚더미에 쫓겨 동해바다에서 텐트를 치고 자거나 숙식이 제공되는 다이빙샵에 잠시 머무르는 등 거의 길거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채널의 인터뷰이로서의 특성에 정확히 부합하기도 했지요.
어쨌든 그 인터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복귀하였습니다.
다시금 재기의 화살을 쏘아 올리려 막 시동을 걸자마자, 저는 뜻하지 않게 예수님을 만났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삶을 갑작스레 살게 됐습니다.
그렇게 오늘 이 순간까지 그야말로 쏜살같은 세월을 지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받게 된 ㅇㅇ님의 메일이 저는 전혀 우연처럼 생각되지 않고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지금 전해드리는 이 답신이 그때 보셨던 인터뷰의 후속편이라고 생각해주셔도 흥미로우실 듯합니다.
오늘 이 글에서 제가 만난 예수님을 ㅇㅇ님께 온전히 전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죄인
Q.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저 생물학적 남자와 여자의 번식 본능의 산물일 뿐, 그냥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저 같은 사람을 굳이 ‘죄인’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일까요?
A.
이 질문에 답을 하기에 앞서, 일단 ㅇㅇ님께서는 죄를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지갑에서 2만 원을 몰래 훔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얼마 안 가 어머니께 걸려서 정말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체벌이 아팠던 것보다도,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저보다 더 크게 울며 저를 꽉 안아주셨죠.
그때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살면서 거짓말은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요.
거짓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친구를 팔고 거짓말했던 기억, 그리고 그 거짓말이 들통나서 망신당할까 봐 잠 못 들던 기억이 저는 아직도 선명합니다.
속으로 누군가를 욕하거나 비방하는 일은 얼마나 많았는지요.
조금만 수 틀리면 속에서 험한 말들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마구 흘러나옵니다.
인터넷 기사의 연예인 가십거리와 정치인들의 스캔들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며 속으로 삿대질하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늘 속이 개운치 못하고 심령이 조금은 어두워집니다.
아주 크고 부끄러운 죄들은 입에 담기도 창피해서 언급할 엄두조차 안 나는데도 벌써부터 현황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가 죄라는 것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잘 압니다.
살인, 강도, 강간 이런 것만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 입으로 짓는 죄, 그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TV에 나오는 흉악 범죄자들이라고 해서 쉽게 정죄하거나 나무라기 어렵습니다.
저도 조건만 맞는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태어나서 이름이 길태라는 살인자 이야기가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 사람처럼 길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살인자가 되었을지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은 금고털이범이었지만 살인죄를 누명으로 뒤집어쓴 채 수감됩니다.
억울했던 그는 꿈속에서 해변가에 앉아 있는 심판관들을 향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따지고 들죠.
그러자 심판관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생을 낭비한 죄!”
그러자 주인공은 체념한 채로 힘 없이 돌아서며 이렇게 읊조리다 잠에서 깨어나죠.
“Guilty, guilty, guilty... (유죄, 유죄, 유죄…)”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감금방에 갇혀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습니다.
누군가에게 큰 원한을 산 일이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악행을 되새김질하며 노트에 하나둘 눌러 적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기록한 ‘악행의 자서전’은 끝도 없이 이어져서 노트로 6권을 빼곡히 채웁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기고 싶어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게 간음이나 다를 바 없고,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자와 다를 바 없으며, 고로 살인자, 강간범 손가락질하기 전에 네 안에 더러운 음욕과 탐심과 비방의 씨앗을 먼저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네 눈 안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준다며 위선을 떠느냐 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한다며 농성하는 군중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 다 똑같은 죄인 주제에 남 정죄하지 말고 너나 똑바로 잘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범죄자에게 ‘너는 범죄자야.’ 라고 하면 범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뭔데 나를 범죄자로 규정하냐?’
규정은 사람들끼리나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저 모든 인간이 죄인이니까 죄인이라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백하게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할 때 종종 실수하는 것 중 하나는, 마치 풀숲에 머리를 박으면 온 세상이 다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는 꿩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사라진 것은 본인의 머리통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만약 진리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애써 외면하거나 혹은 괜히 대적하여 죄의 분량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진리를 있는 그대로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손쉽게 한 마리 꿩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님의 물음 앞에서 단순히 인간에게 죄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일차원적인 부분을 두고 논쟁을 하기보다, 더 넓은 시선에서 진리라는 게 정말 있는지, 그리고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성경은 과연 그 진리인 것인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딱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진화론을 믿는 사람, 그리고 세상이 어떤 위대한 지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창조됐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종간 진화에 대한 증명이 불가합니다.
그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라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가설입니다. 사실 가설이라고 쓰고 소설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봐도 나옵니다.
사람을 현혹하는 이런 저런 말잔치를 다 빼고 본질만 볼 줄 알면 누구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화론은 무질서에서 질서가, 그것도 우연히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자연의 모든 과정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즉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진화론은 우습게도 가장 비과학적입니다.
이러한 진화론을 믿는다면 인간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성욕의 산물과도 같이 우연히 발생된 돌연변이 개체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진화론을 믿으면 인간의 존엄성이 짐승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또한 우리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예술가의 정교한 표현력에 감탄합니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감독이 미장센에 숨겨둔 의미를 파악하려 애씁니다.
아이폰 내부의 복잡한 기판과 회로를 보며, 또 자동차의 정교한 엔진을 보며 현대 문명과 과학 기술력에 감탄하죠.
어느 누구도 하나의 작품이, 한 편의 영화가, 한 대의 아이폰과 자동차가, 예술가, 감독, 발명가, 엔지니어 없이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말마다 미술관에 가서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인간의 본성이 어떻고 저떻고 고상하게 논하는 지성인들이, 그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을 보면서는 그 인간을 만든 존재가 없다고 믿는다는 게 무척이나 아이러니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만약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했을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지금 바로 성경책을 펼쳐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책은 이 지구상에 성경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창조라는 것은 피조물의 두뇌로는 도무지 꾸며낼 수가 없는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창조에는 아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는 다 똑같아 보일지라도, 이러한 성경적 창조가 사실임을 믿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딱 두 부류로 나뉩니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는 세상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 책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 6일째,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흙덩이에 불과했던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빚어진 첫 사람 아담과 그 아내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취식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시면 정말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때 죄가 없던 세상에 처음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의 룰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에 반드시 죽습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작든 크든 반드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실만큼 완전했던 이 피조 세계에 죄가 들어와서 오염될 것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스스로 육신을 입고 시간 속에 들어와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모든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세상 죄를 일시에 제거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에 사로잡힌 피조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십자가에 박히는 편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구약 성경에 300번 이상 예언해두었습니다.
그 모든 구약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하시며 2천 년 전,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을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읽던 이 글을 잠시 접어두시고 지금 당장 ‘이사야 53장’을 검색해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자그마치 700년 전에 쓰여진 것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소름끼칠 정도로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여전히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찢어버리고 애써 외면합니다.
그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끌어안은 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피조물에게 매 맞고 침 뱉음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지금은 하나님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2025년을 살아가면서도 올해가 왜 2025년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 이후 약 2025년이 지난 시점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단위로 살아가면서도 일주일이 왜 일요일부터 시작하는지, 왜 우리가 일요일마다 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 박해하던 기독교를 결국 공인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일요일을 공휴일이자 한 주의 시작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탄생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모든 죗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진실되게 고백할 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효력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믿는 그 즉시 죄 없는 의인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죄가 없어졌으니 하나님과 다시 연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구원의 증거로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께서 직접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이 됐으니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죽어도 세상 끝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삽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됐습니까?
예수님 덕분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으나 유일하게 죄는 없으셨던 그 분이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를 이미 단번에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말고는 구원의 다른 이름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흘리신 대속(대신속죄)의 피 말고는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종교적 가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인을 죄인이라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죄인이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모든 죗값은 예수님의 피로 이미 다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죄인이 할 일은 통회하는 심령으로 돌이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자는 구원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 뒤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보혈로 온 몸이 뒤덮혀 값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죽고 나서 깨닫느냐, 죽기 전에 깨닫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2. 정욕
Q.
왜 그렇게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위해, 오히려 오감과 육감으로 실제로 느낄 수 있는 ‘현재’를 지나치게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A.
두 가지 말씀을 주신 것 같습니다.
- 성경은 금욕적인 삶을 강조한다.
- 이는 ‘현재’를 지나치게 포기하는 것이다.
1) “성경은 금욕적인 삶을 강조한다”
금욕에 대해서 말씀하시니 일단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담배를 끊었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소문난 골초였던 저는 담배를 하루에 한 갑~많게는 두 갑씩 십수 년 이상 매일 피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저는 담배를 끊어야 할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성경에 담배를 피우면 죄라는 말이 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마음에 큰 불편함이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전에도 담배를 끊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한번은 담배를 끊어야지 결심하고서 가지고 있던 담배를 전부 부러뜨려 변기통에 넣고 사진을 찍고 물을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30분도 안 되어 편의점에 가서 다시 새 담배를 샀던 적이 몹시 여러 번일 정도로 저는 중증 니코틴 중독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을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같이 담배 피우던 동생들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몰랐지만, 제가 평생 부정하며 살아왔던 예수님이 진짜로 살아 계시고, 성경 말씀이 정말 진리라는 것, 이 세상의 겉만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것들이 사실 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것, 우리가 다 마귀에게 속아 스스로 지옥불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 저는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가슴에 불이 붙는 듯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들을 앉혀 놓고, 창세기부터 이스라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까지, 부족한 지식들과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냈습니다.
간절한 마음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제가 미친 사람 같았을 것입니다.
동생들은 저를 몹시 안타깝게 바라보았고, 저도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습니다.
동생들은 얼마 안 가 제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내 힘으로 믿게 할 수 없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멈추지 않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남겨진 자리에서 저는 평소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담배 끊어. 담배 끊어. 담배 끊어.”
이 말이 조금 과장해서 100번 이상 귓속에 아주 세게 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입니까? 저는 인내심이 부족하여 제 힘으로는 도무지 담배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시면 제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까지 단번에 사라지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고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저도 모르게 풀숲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그 즉시 거짓말처럼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가 딱,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금욕을 강조했기 때문에 금욕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에 빠져 허우적대며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자가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바랐던 상황에서 응답을 받은 것이죠.
한편 성 문제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그러고는 그의 갈빗대를 취해 아내 하와를 만들어주십니다.
또한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금욕하라는 메시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쾌락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가정이라는 건전한 제도 안에서 정절을 지키며 질서 있게 누리라는 것이지요.
창조된 세계의 질서와 기준을 인간이 제멋대로 해체하면 가장 먼저 성적으로 방종하여 타락합니다.
성경에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한다” 하였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무작정 금욕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더러운 짓거리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말씀주신 금욕이라는 것이 단순히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욕구의 충족을 금하고, 인간은 이를 무작정 따라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내용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절간에 들어가서 도 닦는 사람들처럼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죄와 율법, 그리고 예수님
님께서 질문주신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일종의 도덕률과 같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먼저 인간의 죄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죄와 율법
여느 법이 다 그러하듯 구약 시대의 율법 또한 상당히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했습니다.
모세 율법을 기록한 구약 성경 레위기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거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는 내용이 수십 차례 이상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읽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히고 등골이 서늘합니다.
율법은 물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우리가 온전히 다 지킬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죄를 이길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금지된 것이 더 유혹적이라는 말처럼 율법으로 금지할수록 이상하게 더 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율법을 통해 역사하는 죄라는 독침에 찔려 인간은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베드로 사도가 여전히 할례 등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애초에 금욕의 멍에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 선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죄가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왜 그것이 필요합니까?
그래야 우리 자신이 몹시 연약하여 반드시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즉 내 힘으로 율법 잘 지키는 것으로는 죄 문제가 절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나 대신 죄의 문제를 미리 다 해결해 두신 예수님께 순종하며 나아오게끔 인도하는 역할을 율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자리잡은 뿌리 깊은 죄의 본성, 그리하여 율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사도 바울은 아래와 같이 얘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이어서 바울은 죄의 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하고 연약한 자신이 예수님 덕분에 죽음의 몸에서 건져지고 구원 받을 수 있었음을 떠올리며 안도합니다.
그러고는 인간의 죄의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아래와 같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지은 죄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만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작든 크든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 아이가 없어 부모의 마음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부모는 자식이 아프거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지요.
그것이 곧 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죗값을 자신이 대신 치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도 전에 우리가 지을 죄를 미리 아시고 용서부터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 불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밥상 다 차려놓고 죄인들이 밥상머리 앞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걸려 넘어지는 돌과도 같은 율법 조문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할 운명이던 우리의 멍에를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율법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율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님의 말씀대로, 얼핏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금욕이라는 멍에를 짊어지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 멋대로 살아갈 자유를 속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면 자유입니까?
술을 마음대로 마시면 자유입니까?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즐기면 자유입니까?
그저 자유라는 단어에 속아 죄의 종노릇 하며 스스로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뿐입니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는 부활하여 지나간 삶에 대해 반드시 심판 받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게 한때 유행했던 신조어로 ‘YOLO(You Only Live Once)족’입니다.
성경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욜로족입니다.
죽으면 끝이고 부활도 심판도 없다고 생각하며 사니까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오늘을 살자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유입니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부끄러워할 그 거짓 자유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어느 유명 사립 대학교의 표어인줄로만 알고 있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성경 말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학문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누구나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 피로 우리 모두의 죄가 눈보다 더 하얗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것이 보혈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죗값이 이미 지불 완료되었다는 이 단 하나의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야 너 오늘부터 사면이다. 해방이다. 가라.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고 살아라.” 죄인한테 갑자기 이러셨다는 겁니다.
진짜냐구요? 네 진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 것이 없이 그저 이 사실을 믿기만 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죄가 없어졌으니 사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몸은 당장 죽어도, 세상 끝 날에 썩지 않는 몸을 입고 살아납니다. 태초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예수님은 오늘도 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진실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3) “이는 ‘현재’를 지나치게 포기하는 것이다.”
믿는 우리는 예수님 외에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정체성은 믿는 즉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단숨에 바뀌었습니다.
길거리의 걸인으로 소망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아들로 신분이 바뀌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여전히 구걸하고 거리의 음식을 주워 먹지는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품위 있게 행동해야지요.
이는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새롭게 된 정체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서 구원받은 자는 당연히 구원받은 자답게 품위를 갖추어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썩어 없어질 세상 정욕이 모두 유치해집니다.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은 그 상태가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정체성이 바뀌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왜 아쉬울 것 하나 없으신 지존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진 고난 받으시면서까지,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먼저 깨끗케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이 새롭게 함을 받아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예처럼 살아가던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은 이들을 불러다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이 대체 무엇이길래 신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유명한 다윗왕은 시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그래서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확고한 반석 위에 쌓아가는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생명책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훗날 우리의 영원한 삶을 좌우할 상급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였고,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경기하는 자들처럼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그 분의 나라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그것이 본론입니다.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했는데 고작 스파링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약속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힘씁니다.
우리는 그렇게 ‘현재’를 삽니다.
3. 휴거
Q.
블로그에서 언급하신 ‘휴거’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999년 즈음에도 사회적 해프닝처럼 다뤄졌던 사건이었는데, 지재님께서는 실제로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믿고 계신건가요?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 남겨진 채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까?
A.
1) 휴거
휴거라는 단어는 1992년도에 다미선교회 사건으로 세간에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이장림 목사가 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라는 책의 앞글자를 딴 다미선교회는 1992년의 나팔절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죠.
그러나 그 날 그 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세간의 큰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휴거라는 단어 자체가 믿는 성도들 사이에서조차도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휴거를 언급만 해도 이단 종말론자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휴거가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성도는 없다고 할 만큼 믿는 성도들끼리도 휴거를 바라보는 관점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휴거는 반드시 있습니다.
왜냐하면 휴거가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래와 같이 성경에 아주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
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51-52]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렇듯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전부 휴거를 확실하게 믿고 기다렸습니다.
휴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믿노라 주여 주여 하면서도 이 말씀만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변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인데 휴거를 부정한다면, 위 말씀을 보여주며 이렇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어떤 구절은 전혀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또한 대중가수 중에서도 크리스천으로 유명한 나얼 씨는 위 구절에 묘사된 휴거를 말씀 그대로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Rapture(휴거)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휴거는 전혀 이상한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 건전한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누구라도 소망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휴거가 실제로 벌어지면 (믿지 않는) ㅇㅇ님과 같은 분들은 남겨지는 것이냐 말씀주셨습니다.
그 부분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성경적 세계관에 따른 하나님의 시간표를 간단히 살펴보고, 성경에서 역사의 마지막 때에 약속하신 휴거에 대한 논쟁이 왜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천년왕국
성경은 인류 역사를 구약 4천 년, 신약 2천 년, 이후 천년왕국, 그 이후 새 하늘 새 땅이라는 영원 세계로 나누어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실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임을 앞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리라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이 되어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을 그 옛날 다윗왕 시대와 같이 재건하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흉악범들을 위한 극형이었던 십자가 형이 예수님께 갑작스레 집행되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돌아가시니 제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허망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군사들에 의해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겁에 질려서 심지어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혼비백산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해서 썩지 않는 몸을 입고 다시 나타나시니 제자들은 기겁했죠.
의심이 많던 도마라는 제자는 예수님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노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실제로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본 후에야 자신이 모시던 그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썩지 않는 몸을 입고 돌아오신 것임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죠.
그러고나서 예수님은 40일 간 제자들에게 이런저런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교육하시고는 구름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던 순간의 장면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제자들이 물었던 그 나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어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실 바로 그 나라.
그것을 우리는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사탄은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결박되고, 짐승의 표에 굴복하지 않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이 천년왕국을 암시하는 구절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휴거 뿐만이 아니라, 이 천년왕국이 실제로 있을 왕국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글자 그대로 천년왕국이 실재한다고 믿지만 어떤 성도들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러한 학설을 ‘무천년설’이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에서 보통 이것을 믿습니다.
여기서 천 년은 진짜 천 년이 아니라 단지 아주 긴 시간을 상징하며, 천년왕국은 훗날 실제로 다가올 왕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명확히 써 있는 구절들을 다 상징으로 치부해버리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해도 다 맞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진리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장사하는 신천지 같은 사이비 이단들이 보통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 무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은 보통 휴거를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물리적 천년왕국을 믿지 않으므로, 천년왕국으로 진입하기 전의 전환기적 사건인 휴거가 필요 없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등에서 휴거에 대해 명확하게 묘사한 구절들까지도 전부 상징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땅이 이미 천년왕국이라 여기니, 자연스럽게 이 땅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좌파 우파 정치 싸움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마음을 다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라 하였습니다.
정말 천국 소망으로 사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과, 장차 도래할 그 분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할 뿐이지, 그렇게 유치한 정치 논쟁에 휘말릴 새가 없습니다.
어쨌든 이 무천년설이라는 주류 학설로 인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정직하게 읽으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휴거를 성도들이 고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휴거를 말하면 이단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무천년설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만드는 그릇된 종말론입니다.
그런데 그 무천년설이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 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약 1900년 만에 기적적으로 재건되고, 그 이스라엘에 지금 이 순간 종말론적 전쟁이 진행중이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벌어지는 등 성경의 무수한 종말 예언들이 실시간으로 마구 성취되고 있음에도, 현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금이 만물의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3) 7년 대환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보면, 역사의 마지막에는 한 이레(7년)의 환란기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다니엘서 9:27에 이 기한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전체가 그러한 7년 환란에 대한 묘사입니다.
구약의 예언서들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묘사한 복음서, 사도 서신서 등에도 이 마지막 환란기의 징조와 관련된 내용이 많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는 예수님 초림에 대한 구절보다 오히려 재림 즉 종말에 대한 구절이 훨씬 많습니다.
성경에는 이 7년 대환란의 끝에 연단을 받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2천 년 전, 자신들이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예수님이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이었음을 결국 인정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외치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아마겟돈 전쟁 즉 인류 마지막 전쟁에서 성도들을 데리고 지상에 내려오셔서 므깃도 평원에 집결한 마귀의 군대를 쳐부술 것입니다.
이후 실제적인 천년왕국이 이 땅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이 대환난에서 미리 건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휴거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휴거의 날짜는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여러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를 유추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남겨집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하셨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고 할 때 뜻밖에 덫과 같이 그 날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영적으로 음행한 죄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하는 저는 휴거되어 올라갈 수 있을까요?
물론 구원 받은 자들은 썩지 않는 몸을 입게 될 구속의 날까지 성령의 인침으로 보증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혹시 제가 들림 받을지, 혹은 들림 받지 못해 남겨질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믿으면 구원받는다고는 명확히 적혀있지만, 모든 성도들이 휴거된다고 적혀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것이 그 기준이라 하면 내가 깨어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지금 깨어서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자기는 깨어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제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맞고, 제 마음의 중심이 정말 주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며 고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저를 반드시 건져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반드시 남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남겨진다는 것이 꼭 비극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런 각성의 기회가 없이 평온한 상황에서 죽었습니다. 그러고나서 깨어나보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인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육체도 유죄 판결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하는 길은 오직 딱 하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죠.
즉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 피로 온 몸이 뒤덮혀서 값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뿐입니다.
“흠, 너는 죽을 죄인인데, 보니까 예수의 피로 죗값이 이미 다 지불됐네. 사면!”
이렇게 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아 값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전부 마귀를 위해 예비된 불못에 함께 떨어집니다. 그래서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그곳에 갇혀 고통 속에 영원히 삽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성경에 기록된 휴거가 실제로 일어난 것을 살아 생전 목격한다면 어떨까요?
성경 말씀이 전부 사실이고, 세상이 정말 끝의 끝까지 와서 이제 역사의 종말이 코앞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겠죠.
내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나의 영혼의 영원한 거처를 위해 무언가 시도해 볼 기회가 다시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미련과 모든 높아진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만이 참 진리임을 알게 되겠죠.
진심으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그 분이 우리 대신 흘려주신 보혈의 권능으로 내 죄도 이미 다 사해졌음을 드디어 믿고 순종하겠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길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돌아왔음을 기뻐하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졌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돌아오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숨이 붙어있을 때, 정말 내가 살면서 택해야 할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보고 실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그 선택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만일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반문하실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의 환란은 창세로부터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만큼 크고 두려운 날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진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난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평생을 바쳐 움켜쥐려 애쓰던 모든 돈은 휴지 조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곧 썩어 없어질 불량식품 사먹지 말고, 영양가 있는 것, 영원히 남을 것으로 제대로 좀 챙겨 먹으라는 겁니다.
썩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잉태될 정금보다 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역대 인간들 중 가장 많이 누렸을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의 창조 목적입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해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이 환란 가운데 남겨진 인간이 택해야 할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4. 마무리하며
삼성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은 죽기 직전에 신에 대한 24가지 물음을 남겼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복음이 무엇인지만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 귀중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 몹시 두려웠을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둔 그제서야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들의 답을 찾고자 황급히 애썼지만, 답을 얻지는 못한 채 한 달 후 타계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숨이 끊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가는데는 순서가 없는 것입니다.
빈자에게도, 부자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죽으면 돌이킬 기회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인생이 주어진 것은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켜 값없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지, 정말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ㅇㅇ님께서 그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허망한 것들을 쫓으며 변죽만 울리다가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바로 결단하십시오. 나중은 없습니다.
이 순간 앉아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부디 진심을 담아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부터 예수님을 제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새 삶을 살기를 원하오니 저를 인도하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 ㅇㅇ님의 세 가지 물음 앞에서 저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예수님의 생명을 나눠 받아 먼저 자유롭게 된 자로서 최선을 다해 답변을 적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몇 마디 글로 담아내기에는 참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모자란 행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ㅇㅇ님께서도 혼잡한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진리를 꼭 움켜쥐게 되시어, 부디 천국에서 다시 만나뵙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아멘.
감사합니다.
홍지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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