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애인과 싸웠다. 아니다. 일방적으로 내가 싸움을 걸었다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주말 저녁, 갑작스럽게 애인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요새 주말마다 철학공부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는 애인이 피곤해서 잠들었나보다 싶었다.
‘잠들었나보네, 잘 자고 일어나서 연락줘요.’
카톡을 한 통 남기고 나도 잠에 들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화가 나고, 섭섭하고, 짜증이 났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애인한테 화가 난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이 괜시리 쿵쾅 쿵쾅 뛰고 어딘가에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뒤척이기를 한참. 잠에서 깬 것인지 애인에게 답장이 왔다. 전날 3시간을 잔 바람에 갑자기 잠에 들었다는 그. 연락을 보자마자 화가 엄청나게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분노의 원인은 불명.
다음부터는 자기 전에 말해달라고 퉁명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눈치가 빠른 애인은 혹시 기다렸냐며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이미 분노가 맥스에 다다른 나는 계속 툴툴거렸다. 그렇게 대전이 발발했다.
우스운 사실은 애인과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화난 이유를 깨달았다. 전날 그가 너무 바빠서 통화를 못했기에 난 그날은 꼭 통화를 하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통화를 못하고 잠들어버린 애인이 야속했던 것. 그런 섭섭함이 확 치고 올라오면서 내 불안을 건드렸고 그게 분노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애인에게 ‘너와 전화하고 싶었어. 그런데 못해서 속상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피곤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짜쳐보였다. 그리고 나만 그를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했다. 다양한 감정이 내 안에서 복합적으로 소용돌이쳤고, 난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생각해 보면 난 관계에 있어 참 물렀다. 상대에게 맞춰주는 것이 항상 디폴트였다. 연인이든, 친구든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상대의 욕망에 매번 맞춰주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엔 항상 서운함이 있었다. ‘내 욕망은 왜 알아주지 않지?’하면서 말이다. 정작 내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본 적도 없으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다니. 그러면서 겉으로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나. 위선적이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나도 욕망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상대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누군가에게 미움 받는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착하게 굴어야만 상대가 나를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걸.
애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난 너와 전화를 하고 싶었고, 근데 그렇지 못해서 화가 난 마음을 네게 미성숙한 방식으로 풀었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들은 애인은 한 5분간 웃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너무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단다. 그리고 그는 내게 욕망에 솔직해도 된다고 말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전화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요구할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라고. 혼자 욕망을 꾹꾹 참다가 터트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며.
그의 말에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욕망에 더욱 충실해져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애인이 퇴근하는 나를 역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의 속마음은 ‘얼른 데리러 와’였지만, 습관이 무섭다고, 이미 입으로는 ‘피곤하지 않아? 그냥 쉬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애인이 잠시 웃더니 본인은 데리러 가고 싶은데 솔직한 내 맘을 말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의 욕망을 털어놓았다. 너무 보고 싶으니 얼른 데리러 와달라고 말이다.
애인에게 물었다.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이기적인 것의 경계를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바라는 걸 네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이기적일 수도 있는 거잖아?’
애인은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원래 욕망은 이기적인 거야. 그렇지만 그걸 숨기고 솔직하지 못한 게 서로에게 더 안 좋은 거야. 서로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하고, 조율해 가면 돼. 그게 성숙한 사랑이지 않을까?’
그래.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난 이제 나의 욕망을 꾹꾹 억누르지 않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더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는 하지 않기로. 오늘도 애인에게 솔직하게 말해 볼 예정이다. 아마 그가 이 글을 볼텐데 앞으로 나의 솔직함을 기대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나를 언제나 보듬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많은 여성들이 나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맞춰주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착한 여자친구가 되는 것에 힘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려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상대에게 말하는 용기는 정말 필요하다. 그렇게 서로의 욕망을 털어놓고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 사랑이 더욱 단단해 질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