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을 좋아했던 할머니를 보내며
새벽 5시 반. 알람이 울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는데 시어머니 이름이 떴다. 개꿈이네. 전화를 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시간에 시어머니 전화라면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남편이 전화를 안 받아 내게 전화했다며 원주로 오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며 짐을 싸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족 장례를 치르는 것도 상복을 입는 것도 처음이었다. 까만 옷이 어디 있지. 당장 오늘 업무는 어떻게 하지? 한 달 넘게 야근 중인 남편은 회사에 가서 노트북을 챙겨 오겠다 했다.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할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원주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서울 홍대에 있는 손자네 신혼집까지 놀러 왔다. 그날 할머니는 홍대 아웃백에서 제일 맛있게 파스타를 먹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잘 먹고 잘 움직이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 없었다. 목소리가 컸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자식들에게, 손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북에서 유년기를 보낸 할머니는 고무신과 초가집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정도로 유복했다고 한다. 전쟁통에 남쪽으로 내려와 결혼을 했고 30대 중반에 남편을 잃었다. 장사를 하며 홀로 세 자식을 키웠다.
결혼식 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백발의 시할머니는 하객들로 북적이는 신부 대기실에 들어와 내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다. 다들 시할머니가 어쩜 그리 곱고 정정하냐고 한 마디씩 했다.
할머니가 약해지기 시작한 건 증손자인 날날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였다. 원래부터 안 좋았던 심장 기능에 이상이 생겼고 약 부작용이 나타났다.
수많은 검사 끝에 병원에서는 고령 환자 누구에게나 할법한 말을 했다. 수술을 하면 괜찮아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수술 중에 사망할 가능성도 있다고. 가족들은 고민 끝에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날날이 생후 100일 즈음이었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은 엉엉 울면서 말했다. 아이가 너무 예쁜데 하루하루 커가는 게 너무 신기한데. 아이가 자라는 것과 할머니가 나이 들어가고 아픈 것, 두 가지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일이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고.
남편의 엄마, 그러니까 시어머니는 시할머니를 4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다. 남편은 태어날 때부터 늘 할머니와 함께였다.
시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전업주부였던 시어머니가 돈을 벌러 나가고 서울에서 원주로 거주지를 옮기고 착실하게 돈을 모아 다시 번듯한 집을 마련을 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할머니가 늘 있었다.
“돈이 없으니까 맨날 귤이랑 라면만 먹는 거야. 그때 할머니랑 화투 진짜 많이 쳤는데.”
남편 가족에게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함께 살을 맞대며 거친 파도를 넘어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과 자부심이. 때론 그 끈끈함이 숨 막혀 나는 자주 관객이 된 것처럼 팔짱을 끼곤 했다. 나는 여기까지. 자꾸만 선을 그었다.
할머니의 몸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 했다. 할머니 옆에 있으면 장기가 밖에 있는 것처럼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숨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커졌다. 할머니의 외출 빈도는 점점 줄었다. 주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들은 약속을 정해놓고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베란다 귀퉁이의 고무나무를 가리켰다.
"저 화분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게...... 얼마나 내 마음을 짓눌렀는지 너는 모를 거야."-최은영 <쇼코의 미소>
며느리와 아들과 손녀가 출근하고 없는 텅 빈 집에서 할머니는 붙박이 가구처럼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속 할아버지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시할머니를 떠올렸다. 하루의 절반은 좁은 방안 TV 앞에서, 또 절반은 거실 창문 앞에서 오늘도 홀로 있을 할머니를.
할머니는 손자며느리인 내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빛은 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을 향해 있었다. 기대가 없는 관계는 부담이 없었다.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대했다. 그냥 노인이 아닌 내 남편이 사랑하는 노인을. 살가운 손자며느리는 아니었다. 다정한 손자인 남편은 원주에 갈 때마다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늘 누워 있거나 앉아만 있던 할머니가 반짝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날날이가 돌도 안 됐을 때였다. 남편이 중국에 일주일간 출장을 갔다. 아이와 단둘이 있는 게 무서워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가로 갔다. 낮에 집에는 나와 아이, 할머니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할머니는 충실한 육아 도우미가 되어줬다. 그때만 해도 집안에서 유모차를 끌어서 아이 잠을 재웠는데 할머니는 아이 낮잠 시간마다 유모차 미는 것을 도와줬다. 시어머니가 해놓고 간 음식으로 내 점심과 간식을 살뜰히 챙겨줬다. 오랜만에 느껴본 효용감 때문이었을까. 할머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느 날은 이북에서 죽창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시할머니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줬다. 몇 번 찔렸는지 횟수까지 정확히.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나이가 들면 옛 기억이 더 또렷해지는 걸까. 피난에 이어 1.4 후퇴 이야기가 나올 때쯤 날날이가 깨서 엄마를 찾았다. 할머니와 나, 둘만의 추억이다.
할머니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어른이었다. 나와 남편이 평등 명절을 실현하겠다며 한참이나 시가를 찾지 않았을 때도, 한동안 남편과 아이만 계속 시가에 갔을 때도, 오랜만에 내가 시가를 찾았을 때도.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줬다. 나이가 들수록 하고 싶은 말을 아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금은 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오늘은 할머니가 쏜다.”
할머니는 밥보다는 특식을 좋아했다. 우리 세 식구가 원주 가는 날은 할머니가 쏘는 날이었다. 짜장면, 막국수, 칼국수, 냉면... 메뉴는 뻔했지만 꼬깃한 현금을 꺼내는 할머니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헤어질 때면 할머니는 남편을 꽉 안으며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또 언제 보냐고. 나는 또다시 관객이 된 기분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할머니라는 책은 뭉텅뭉텅 뜯어져 나갔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난해 가을, 할머니의 다리가 급속도로 붓기 시작했다. 점점 밥 넘기는 걸 힘들어했다. 급격히 살이 빠졌고 거동이 어려워졌다. 심장이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술을 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했다 요양병원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는 전면 금지됐다. 휴대폰도 들고 들어갈 수 없었다. 충격이었던 걸까.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열흘간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요양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할머니는 오징어회를 맛있게 먹었고 다음 날에는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다. 그날 할머니는 유난히 거실 소파에 오래 앉아 있었다. 남편이 할머니를 위해 사온 담요를 할머니 어깨 위에 덮어줬다. 헤어질 때 할머니는 남편과 날날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또 언제 보냐고. 그게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할머니를 안아드릴 걸,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드릴 걸 그랬다.
얼마 후, 상태가 더 안 좋아진 할머니는 결국 다시 요양병원으로 갔다. 이번에는 휴대폰을 들고. 할머니는 새벽이고 밤이고 수시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전화했다. 여기서 나가서 집에 가고 싶다고. 또 어떤 날은 딸기와 요거트를 먹고 싶다고. 전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낮도 밤도 없이 할머니는 아무것도 안 먹고 잠만 잤다. 시부모님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요양 병원에서 지낸 지 한 달 즈음,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다고 했던 음식은 짜장면이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짜장면을 포장해서 요양병원 입구에 맡기고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시부모님은 방진복을 입고 요양병원에 들어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입관하던 날, 할머니의 야윈 팔을 보며 가족들은 오열했다. 40년을 한 집에 모시고 살았는데,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시부모님은 두고두고 미안해 했다.
할머니가 생전에 만나고 싶어했던 가족들이 하나둘 마스크를 끼고 빈소를 찾았다. 코로나 때문에 못 온 사람이 더 많았다. 여섯 살이 된 날날이는 장례식장이 놀이터라도 된 것처럼 신나게 뛰어놀았다. 발인하는 날, “왕할머니 데려다주고 오자”고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진짜 할머니는 죽었는데 가짜 할머니를 어디 데려다주는 거야?""할머니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어디 할머니가 있다는 거야?"
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고 나오는데 봄날처럼 날씨가 따뜻했다. 꽁꽁 얼렸던 날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도 센스가 좋았다.
집에 돌아와 상복을 벗고 가족들은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한 음식이었던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여전히 방안에 할머니가 홀로 누워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