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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25. 2020

할머니의 낙상, 끼어버린 엄마

늙은 딸은 늙은 엄마를 돌본다

퇴근길,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나 : “일해?”
엄마 : “어, 통화 가능해. 니는 퇴근하나.”


보통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5분 남짓이면 끝날 무심한 대화가 요즘은 좀 더 길어진다.


지하철에 올라 너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아이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아이가 했던 행동, 말. 하나하나 세세하게. 때로는 과장도 좀 섞는다. 한참을 웃던 엄마는 말했다.


“그래도 날날이 이야기 들으니까 기분 좋다. 날날이 아니면 웃을 일이 없네.”


엄마는 요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외할머니 때문이다.




할머니의 낙상


광안리 해변에서 친정엄마와 아이


연일 폭염 경보가 울리던 지난해 늦여름, 할머니는 골반이 골절되는 사고를 겪었다.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만류를 뒤로 하고 또다시 밭에 나간 날이었다. 넘어지면서 커다란 돌덩이에 부딪혔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밭이었다. 일어설 수 없을 지경으로 다쳤지만 하필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 날이 더워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할머니는 네 발로 몇 시간(할머니피셜)을 기어서 집에 도착해 구급차를 불렀다. 골반은 더 심하게 부서졌다.


할머니의 소식을 주변에 전하자 다들 안타까워하면서도 노인들에게는 너무나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고관절이 부러지고 걷지 못하고 근육이 빠지면서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상황. 할머니를 이대로 잃게 되는 걸까 두려웠다.


그날 이후 엄마는 일주일에 몇 번씩 할머니 병원을 찾고 있다. 일해서 돈 벌어야지, 할머니도 챙겨야지. 엄마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4남매가 있어도 할머니에게 1번은 늘 큰 딸인 엄마였다.


“아들은 어렵고, 막내딸은 안쓰럽고, 엄마한테는 백날 만만한 게 내지, 내.”


엄마는 씁쓸하게 말했다. 마지막 말은 늘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노. 엄만데.”


입원 초기, 할머니는 좀처럼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기 힘들어했다. 병원에 못 있겠다고, 죽어도 좋으니 수술시켜 달라고, 시골집에 보내 달라고 난동을 부렸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갑자기 귀도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매일 할머니와 전쟁을 치렀다.




할머니의 아나고


할머니집 마당에 있는 밭


할머니는 부산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시골집에 혼자 살았다. 삼촌이 부산에서 모시겠다 해도 한사코 시골집을 고집했다.


억척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모습을 한다면 우리 할머니가 될까. 할머니의 밭에 대한 집착은 누구도 꺾을  없었다. 수년 전 무릎 수술했을 때도 할머니는 기어서 집 마당에 있는 밭을 가꿨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할머니의 신경은 온통 밭, 그놈의 밭에 쏠려있었다. 할머니 성화에 가족들은 병원과 시골집을 번갈아 찾아야 했다.


의사는 할머니가 너무 고령이라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수술하다 잘 못 될 수도 있고, 수술한다고 해서 걸을 수 있는 보장도 없다고. 이제 걷기는 힘들지 않겠냐는 말도 했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가족들은 조심스레 요양원을 알아봤다.


억척은 어디 가지 않는다. 한동안 크게 낙담했던 할머니는 갑자기 생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잘 먹어야 뼈도 잘 붙는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아나고 회를 사달라 했고, 병원에서 화장실 잘 가는 환자로 소문날 정도로 많이 먹었다. “할머니 얼굴에 윤기가 반질반질 흐른다니까. 본인 말로는 뼈도 잘 붙고 있는 것 같대.” 엄마가 말했다.


시골집에 있을 때는 밭일, 집안일 하느라 바빠서 밥도 잘 안 챙겨 먹던 사람이 짜장면을 사달라고 하지를 않나, 어떤 날은 엄마한테 잡채가 먹고 싶다고 했다. 환갑인 엄마는 88세 엄마를 위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잡채를 만들었다.




끝이 없다, 끝이


할머니 만나러 간 요양병원에서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하자 시골집을 향한 할머니의 열망은 더욱 커졌다. 요양병원에 있다가는 결국 죽어나간다고, 무조건 시골집에 가겠다고. 너네가 안 보내주면 혼자 택시 타고라도 가겠다고.


“자식들 다 키워놨더니 이게 뭔 고생이고. 자식새끼들은 귀엽기라도 하지, 할매땜에 미치겠다.”


“자식새끼들은 귀엽기라도 하지”라는 엄마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귀여운 자식일까.


아이가 태어난 후, 엄마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머무르다 갔다.


엄마가 오는 날은 숨통이 트이는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쫓기듯이 퇴근하지 않아도 됐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약속을 잡았다.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도 늘 일 때문에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친정엄마들처럼 아이를   봐주는 엄마가  못마땅했다.


할머니가 다친 후 이제 엄마 찬스는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아이가 그만큼 손이 덜 가기도 하고, 내가 아니라도 엄마는 충분히 힘드니까. 그러면서도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여전히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데.


기어코 다시 걷기에 성공한 할머니는 꿈에 그리던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조금만 따뜻해지면 돌아가자고, 혼자 지내다 또 사고 나면 어쩌냐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억척은 어디 가지 않는다.


엄마는 주말마다 시골에 가서 할머니 목욕을 시키고, 반찬을 해서 나른다.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면서 엄마에게 수시로 전화를 건다.


“병원에 있을 때는 밥 걱정은 안 해도 됐는데… 끝이 없다. 끝이… 그래도 할매가 좋다니까 됐지.”


끝없는 돌봄 노동. 늙은 딸은 늙은 엄마를 돌보느라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다.


젊은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 거는 것밖에 없다. 집에 별 일 없냐고, 나는 잘 지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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