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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홍의취향

좋아요만 누르고 댓글은 안 다는 친구

[홍의 취향] 친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고민인 여자들에게

by 홍밀밀

크리스마스이브, 갑자기 자유부인이 됐다. 남편은 겨울방학을 맞아 아이 데리고 시가에 갔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과연 나를 만나줄 사람이 있을까. 주변에는 죄다 애 엄마뿐이었다.


연락 안 한 지 한참 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하냐고, 아직 연애하냐고. 연애 끝난 지가 언젠데. 친구는 말했다. 친구 회사 앞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친구 회사 앞에서 우리 집 근처 이자카야로, 다시 우리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열두 시가 넘었다.


결혼 전까지 몇 년을 함께 살았을 정도로 친한 친구였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우리 집에서 친구와 나, 남편이 셋이서 홈파티를 하기도 했다. 여동생이 없는 내게 친구는 친정 여동생 같았다.


친구와 멀어지기 시작한 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출산 50일쯤 됐을까. 친구는 휴가를 내고 신생아 옷과 내가 먹을 간식을 백화점에서 사 들고 왔다. 아이 재우느라 씨름하는 내게 친구는 그냥 눕혀서 재우면 안 되냐고, 애가 울면 좀 어떻냐고 말했다. 모성애가 대단하다고도 했다.


그 말이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었을까. 나도 출산 전에는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아이는 잠 오면 그냥 알아서 자는 줄 알았다. 엄마들이 왜 저리 유난인가 싶었다. 친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친구의 진심을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처럼 힘들었다. 나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 같았다. 누구든 원망하고 싶었다.


그날 이후 친구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물론 티 나게 싸우지는 않았다. 친구의 연락에 형식적으로 답했고,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이 줄었다. 우리는 한두 달에 한번 보던 사이에서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이가 됐다.




두 친구





윤이형의 소설 <붕대감기>.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진경과 세연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멀어진다. 세연은 진경이 올리는 SNS 글에 ‘좋아요’는 누르지만 댓글은 달지 않는다.


진경은 세연이 신경 쓰인다. SNS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면서도 세연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 의식한다.


진경은 평범한 아이 엄마가 된 자신과 달리 잘 나가는 비혼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세연을 동경한다. 동시에 팍팍하고 비장해진 세연에게 연민을 느낀다. 진경은 세연에게 물기를 찾아주고 싶다.


진경이 세연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처럼 세연도 진경에게 남모를 자격지심을 느낀다. 자신이 사는 낡은 빌라 계단을 진경과 함께 오르는 것도, 욕조가 없는 욕실을 진경에게 보여주는 것도 세연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


세연은 진경을 볼 때마다 27년 전, 못나고 미숙했던 자신을 자꾸만 미워하게 된다. 머리에 묶는 붕대 길이를 조절하지 못해 진경을 아프게 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던 소녀를.


여전히 관계에 서툰 세연은 자꾸만 진경을 밀어낸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차라리 혼자되기를 택한다. 그러면서도 세연은 진경을 자주 떠올린다.



상처 받을 용기



“세연은 진경과는 이제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회색 노트에 둘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고, 여기에 번갈아서 일기를 쓰자, 말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진경은 세연과 무언가 공유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까? 그들 사이에 공통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붕대감기> p.261(e북 기준)


세연과 진경의 이야기를 읽으며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가 될 때 많은 것을 따지지 않았던 시절이. 좋은 건 좋다고 나쁜 건 나쁘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몇 번이고 절교했다 울고 불며 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하던 날들이.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도 자연스레 넓어질 거라 생각했다. 만나는 사람이 많아지니 아는 사람도 많아질 거라고. 실제로 만나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친구라 부를 사람은 점점 줄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우정은 다른 영역이었다.


대신 지레짐작하는 일이 늘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이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 저 사람은 저걸 싫어하겠지. 말을 골랐고 몸을 사렸다. 어느 순간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만 남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카톡 답이 조금만 늦어지거나 심드렁한 반응이 나오면 내가 혹시 뭘 잘못하지 않았을까 검열했다.


차라리 친구와 소리 높여 싸웠다면 어땠을까. 네가 그렇게 말해서 기분 나빴다고.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너무 힘들었는데 네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고. 맨날 집에서 혼자 아이와 씨름하느라 힘든데 자주 놀러 오지 않아서 서운했다고.


이제 우리는 싸울 수 없는 사람이 된 걸까. 그게 정말 어른다운 걸까.


다시 크리스마스이브. 20대 시절, 자취방에서 취업 고민하던 친구와 나는 일하는 30대 중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력 10년이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어렵고 막막하냐고.


결혼과 육아. 친구와 나는 제법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그날 우리는 자주 웃었다. 어제도 만난 사람들처럼.


<붕대감기>에는 진경과 세연 이외에도 다양한 나이, 다양한 계층, 다양한 배경의 여성이 등장한다. 관계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책을 통해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데 왜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 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 진경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너한테는, 나는 상처 받고, 배울 준비가 됐다고!” p.272(e북 기준)


내게는 상처 받을 용기가 남아 있을까. 친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고민인 여자들과 함께 읽고 싶다.






*<붕대감기>를 쓴 윤이형 작가는 최근 이상문학상 사태에 항의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이 책이 윤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읽는 내내 마음이 쓰렸다.




[홍의취향] 잡식성 취향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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