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홍의취향

‘불륜커플’ 영화로 기억되기엔 너무 아까운

[홍의 취향] 경계를 넘어선 여자 <아사코>

by 홍밀밀


*<아사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9년 올해의 영화를 꼽으라면 당연히 <벌새>였다. 12월까지도 흔들림 없이. 그런데 연말에 왓챠플레이에서 본 영화 한편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제목은 <아사코>.


맞다. 연초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던 일본 배우 두 명이 주인공으로 나온 바로 그 영화다. ‘불륜설 커플’이 나온 영화로 기억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영화.


(그들이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전혀 관심 없다. 한국에서 그리 유명하지도 않았던 일본 배우의 가십이 왜 이렇게 한국에서 화제가 되는지도).


처음에 포스터를 보고는 그저 그런 연애 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영화가 3분의 2쯤 진행됐을 때, 아사코(카라타 에리카 분)는 지금까지의 삶과 맥락이 전혀 맞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선택을 너무나 과감히 내린다. 마치 그 결정만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처럼.


순간 영화 전체의 온도와 속도와 장르가 바뀐다. 이 영화 뭐야. 지금까지 내가 본 건 뭐였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잡고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이 영화 뭐야



달리는 자동차 창밖으로 전화기를 던져버리는 아사코. 돌아갈 길을 끊어버린 아사코는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말한다.


“나도 지금 마치 꿈꾸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지금까지의 시간이 긴 꿈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엄청 행복한 꿈이었지. 내가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나는 전혀 변한 게 없어.”


아사코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용서 받지 못할 선택을 했다는 것도. 꽤나 성장한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것도. 어쩌면 아사코에게 가장 실망한 사람은 아사코 자신일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난 아사코는 또 다시 의외의 선택을 내린다. 누군가는 물어볼 수도 있다. 결국 다시 돌아갈 거면서 애초에 왜 그런 바보같은 결정을 했냐고.


“한 번 경계를 넘어본 사람은 두 세계, 두 차원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는 경계를 넘기 전과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 제현주 <일하는 마음>


인상 깊은 건 그 다음이다. 시종일관 수동적이고 속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이던 아사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아사코는 홀로 방파제 위에 올라 무섭게 치는 파도를 바라본다.




더러운 강



이전의 아사코였다면 또 다시 혼자 어디론가 숨어버렸을 것이다. 아사코는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 분)에게 돌아가기로 한다. 고개 숙여 돈을 빌리고, 뚜벅뚜벅 걷고, 숨가쁘게 뛰고, 비 맞은 몸으로 절규하며 문을 두드린다.


다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더는 기대지는 않겠다는 아사코에게 료헤이는 말한다. 아마도 널 평생 못 믿을 거라고. 아사코는 답한다. 알고 있다고.


끝까지 가보지 않는다면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선택 다음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눈을 질끈 감고 기꺼이 경계를 넘는 것. 맥락도 개연성도 없이 무모하게. 인생에서는 때로 그런 선택이 필요하다. 물론 선택에 따른 책임은 오롯이 짊어진 채.


영화 마지막, 두 주인공은 나란히 서서 불어난 강물을 바라본다.


“더러운 강이군.”

“그래도 아름다워.”


깨끗하고 잔잔한 강만 아름다운 건 아니다. 뒤섞이고 휩쓸려서 더러운 강도 아름다울 수 있다. 아사코는 내게 그걸 알려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