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아 Jan 10. 2023

‘적당함’에 대한 강박

영화 <비바리움> 후기


비바리움(vivarium)

: 작은 동물(특히 작은 파충류)들을 애완용이나 연구용으로 기르는 전면이 유리인 컨테이너.


​​


줄거리


영화 <비바리움>의 서사는 ‘제마’와 ‘톰’이 함께 살 집을 구하면서 시작된다. 부동산 시장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두 사람은 한 공인중개사를 찾아가고, 얼결에 곧바로 집을 보러 간다.

공인중개사 ‘마틴’은 어딘가 작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과장된 표현과 부자연스러운 반응이 불쾌감을 자아낸다. 그들이 방문한 욘더는 모든 주택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생겼고, 주택 내부는 하나의 색으로 칠해졌으며, 획일적으로 구획된 단지 내에 위치해 있다. 대문 앞에 쓰인 숫자가 아니면 구분할 수 없는 이 집에 두 사람은 거부감이 든다. 뒷마당을 보고 나서려는 순간 공인중개사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고, 차를 타고 단지를 빠져나가려 분투하지만 실패한다.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는 계속해서 죽지 않을 만큼의 물품이 어디선가 제공되고, 매일이 소름 끼치게 똑같은 어느 날 탈출 조건으로 한 과제가 주어진다.​


극 중 인물 제마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톰은 조경사로 보인다. 그 때문에 9번 주택에 갇히자 그들은 각자의 방식에 몰두한다. 톰은 탈출에 대한 희망으로 앞마당을 종일 파고, 제마는 과제로 주어진 아이를 돌본다. 돌볼 나무와 화초를 빼앗긴 톰과 돌볼 아이를 부여받은 제마가 처한 상황은 사뭇 달라 보인다. 어떤 순간에도 함께일 것 같던 두 사람은 아이를 두고 갈등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을 가둔 누군가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간다. 여성은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타인을 보고 배우며 성장한다.​



놀라운 정도로 빨리 자라며 부자연스럽고, 더욱이 목소리가 이상한 소년은 언뜻 보면 인간 같고, 달리 보면 괴물 같다. 이를 두고 제마와 톰이 의견 차이를 보이지만, 제마는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돌본다. 흉내 놀이를 꾸며 아이가 사라진 때에 누구를 만났는지를 묘사하도록 만든 제마는 그가 인간이 아닌 존재임을 알고 경악한다.

제마에게 ‘엄마’라고 부르지만 톰과 제마의 죽음을 마치 텃밭을 가꾸는 것처럼 대하는 성년이 된 ‘남자’는 두 사람이 모두 죽자 제마의 차를 타고 단지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전임 공인중개사의 자리와 이름을 이어받아 전임자의 죽음을 처리하고, 다음 손님을 기다린다.




‘적당함’에 대한 강박


주택단지 ‘욘더’의 9호 주택에는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돼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그림조차 주택 외관 풍경을 담고 있다. 바람도, 소음도 없는 9호 주택에는 오로지 제마와 톰만이 살아 숨 쉬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들을 어디서나, 항상 감시하는 듯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낸다. 요구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비명을 지른다. 두 사람이 아이에게 표현하는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하늘을 보면서 ‘멋진 집’과 ‘멋진 하늘’ 덕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이의 모든 행동은 작위적이고 학습된 것 같다. 아이는 두 사람 외에도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텔레비전 영상과 책 한 권으로 외부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 후반에 밝혀지지만 아이가 필요로 했던 것은 ‘진짜 인간’의 ‘정상적인 행동’을 학습하는 것이었다. 제마와 톰은 교본의 역할로 이용당해 왔고, 쓰임새를 다하자 폐기되었다. 제마의 죽음 직전 ‘남자’는 제마에게 ‘아들을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해주는 사람’은 그 후에 죽는다고 말한다.



정상가족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그려내면서 그 안의 끔찍한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분담은 두 주인공 모두의 죽음과 파충류를 닮은 존재의 연속성을 가져온다. 극 초반 공인중개사 ‘마틴’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욘더(yonder)’라는 주택단지는 ‘적당히 가까우면서 적당히 먼 곳, 딱 적당한 거리에 있’다. 영단어 ‘yonder’는 ‘저 멀리 보이는 곳이나 방향’을 뜻한다. 즉 가까이 있지 않다. 정상성을 구현했다고 여겨지나, 정상성은 이상적인 것이어서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 어느 대상에나 그것은 ‘저 멀리 있는 어떤 것’이다.

완벽하게 정상적인 조건에서 자란 ‘남자’는 관객에게 결코 정상적인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설명하거나 표상하고자 할 때 남자와 얼마나 다르게 묘사할 수 있을까? 완벽하게 구름다운 구름을 보면서 ‘진짜 구름’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성이란 어쩌면 허상일지 모른다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005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