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유럽 여행의 첫날이다. 아침에 집 앞 역의 가게에서 빵을 샀다. 갈릭 크림치즈 빵과 옥수수 깨찰빵. 표면은 차갑고 크림은 굳어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옥수수 깨찰빵은 이름에 걸맞은 쫀득함과 은은한 달달함 대신푸석함과 기분 나쁜 딱딱하고 끈적한 식감이 자리를 꿰찼다. 배를 채울 수 있는 것 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칙칙한 맛이 되려 여행의 기대를 돋운다. 지금은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상하이에 내려 12시간의 경유 후 마르세유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에 타는 건 늘 무섭다. 괜히 여행길에 올랐나 하는 후회도 든다.
2/11
마르세유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다. 좀 전에는 난기류 탓에 비행기가 출렁였다. 유럽에 끝내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다.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비행기의 사고 확률은 낮다고 한다. 그러나 희박하지만 늘 존재하는 비정한 하나의 수가 내게 닥칠 것만 같다. 슬픔과 죄책감은 주변에 떠넘기고 사라질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나서 브런치에 쓴 글들이 화제가 되어 인기를 끌 것만 같다(이건 상상하면서 꽤 좋았다). 아직 3시간의 비행이 남았지만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앞자리 사람이 잠을 자기 위한 적합한 자세를 찾지 못한 듯하다. 이륙 후 9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 앞 좌석 등받이에 베개를 두고 머리를 기대기도,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창가에 머리를 대기도 하지만 몸의 힘이 절로 풀리고 눈이 스르르 감기는 완벽한 자세를 찾기란 쉽지 않다. 화가 났는지 범퍼카에 탄 듯 등받이에 몸을 팍팍 부딪힌다. 덩달아 짜증이 난다.
기내식은 그저 그랬다.
2/12
마르세유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피해의식일진 모르겠으나 내게 보내는 차가운 눈빛과 우리 일행을 볼 때마다 풍기는 야릇한 분위기는 날 적개심에 불타게 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치안이 안 좋은 곳이라 해서 쫄았지만 몇 번의 사소한 인종차별(니하오~, 차이니즈?, 재패니즈?) 말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전통의 멋을 간직한 아름다운 건물과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 있는 벽돌 바닥이 날 반겼지만 정이 퍽 들지 않는 도시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중국행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의 경유를 거쳐, 마르세유로 향하는 12시간의 비행까지, 강행군에 녹초가 되었으나 파리로 향하는 10시간의 야간열차가 남았다.
야간열차를 타고 파리로 향한 뒤 운 좋게 얼리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원준이와 전부터 약속한 러닝을 하고 왔다. 숙소 앞에서 시작해 원준이의 안내에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에 다다랐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춰 길게 시간을 보내며 눈으로 핥고 코로 간직하며 귀로 더듬는 명소를 우리는 땀이 섞인 호흡을 뱉고 바삐 발을 옮기고 가벼운 발자국을 남기며 간직했다. 정말 좋았다.
2/15
파리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노트르담 대성당, 개선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삼는 랜드마크를 원 없이 보고 훑었다. 그러나 내겐 파리 첫날 걸었던 이름 모를 거리와, 지나가는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빵냄새가 좋았다. 어제는 담배를 한 갑 샀다. 물갈이가 심해 일행(원준, 진우, 민석, 희원)들과 떨어져 먼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 있던 여성 분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머릿결의 금발 머리와 빈티지한 느낌의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이었다. 코트의 어깨선에 머리카락 끝 부분이 닿아 있는 것이 참 잘 어울렸다.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린 그녀는 종이를 꺼내 들어 입에 물더니 그 사이에 담뱃잎을 채우고는 조심스럽게 말았다. 주머니 속 라이터를 꺼내 직접 만든 담배를 입에 물더니 표정을 찡그리고 천천히 연기를 삼켰다. 뱉는 건 빨랐다. 담배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담배 피우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배탈이 나 음식도 제대로 못 먹어 심술이 잔뜩 났던 내게 그녀의 모습은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숙소보다 두 정류장 앞선 곳에 내렸다. 이미 그날의 여행은 배탈로 끝났다고 생각한 내게 새로운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담배가게를 찾아다녔다. 꽤 늦은 시간이었기에 연 곳은 많지 않았으나 숙소 앞에서 기다리던 담배가게(아직 영업 중인)를 찾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만 파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기에 레종을 달라고 했다(담배를 사본 적이 없었기에 프랑스 느낌이 나는 레종이 프랑스 담배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레종은 한국 담배였다). 종업원은 내 발음을 못 알아들은 듯했고 난 가장 유명한 담배와 라이터를 달라고 했다. 내가 받은 건 말보로 레드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도 말보로 레드는 알고 있었다. 얼른 담배를 받은 나는 가게 옆에 서서 불을 붙였다. 첫숨을 들이마시고 폐 속으로 넣으려 했지만 너무나도 쓰고 매캐해서 토해내듯 기침만 나왔다. 그렇게 첫 개비는 입으로 뻐끔이다 끝났다. 기분은 좋았다. 여행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을 찾은 듯했다.
2/19
프랑스에서 기차를 타고 영국에서 3일을 보냈다. 프랑스 여행과는 달리 꽤 여유로운 여행이었다. 기대했던 축구(토트넘과 맨유 경기를 봤다)는 내 기대만큼 재밌진 않았고 빅벤도 내겐 거대한 시계탑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걷다 발견한 위스키 가게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사이즈의 위스키를 사서(가게 주인이 추천해 준 위스키였다. 이름은 까먹었다) 홀짝였던 게 더 좋았다. 도수 높은 술로 뜨거워진 속에 담배 연기를 마구 집어넣는 것도 꽤 괜찮았다(이때쯤부터는 매캐한 느낌도 많이 사라졌다). 리뷰를 보지 않고 무작정 들어간 에스프레소 바에서 산 베이컨 샌드위치, 카페 라떼가 좋았다. 야외 벤치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희원이와 노래를 들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소박한 일상이지만 내겐 어떤 관광지를 본 것보다 특별하고 거대한 경험이었다.
내일 향하는 모로코에서는 어떤 웃음과 행복, 불쾌, 불편이 함께할지 궁금하다.
2/22
모로코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니스의 숙소 라운지에 앉아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다. 피곤하고, 한국이 그리워지며, 집밥이 떠오르는 고단한 모로코 여행이었다. 동시에 가장 황홀하고, 비현실적이며,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남아 언제고 불쑥불쑥 떠오를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사막은 그 어떤 곳보다 광활했고 그곳의 별은 멍해지며 계속 쳐다보게 되는 아름다운 여신과 같았다. 고생 아닌 고생을 겪으니 그토록 생소하고 무서웠던 프랑스가 정겹게 느껴진다.
담배는 한국에서는 피우지 않을 생각이다. 소중한 순간, 풍경을 기억에 남기기 위해 소중히 태웠던 한 개비의 담배가 한국에서는 어색한 이들과 말을 트기 위한 불쏘시개쯤으로 쓰이는 게 싫다.
2/23
어제 만난 한국인 정원님은 예술과 글에 관심이 많았다.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 거기다 나와 관심 분야까지 같다니! 신이 난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또 대답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감각에 집중할 때 현실을 살게 된다. 내가 감각에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좋은 노래를 들을 때도 항상 게임 혹은 과제 중이었다. 내가 노래에만 집중해서 만끽한 적이 있던가?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아무런 방해 없이 곱씹어 본 적이 있던가? 여행 내내 마음에 남은 문장이다.
2/25
내일이면 중국으로 향한다. 여행길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난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길 바란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박수를 보내기보단 사소한 흠을 잡아 깎아내리기 바쁘다. 내가 잘난 분야에선 누구도 날 넘볼 수 없게 타인의 용기를 뺏고 날 내세운다. 그런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런 사악한 행복도 행복이라며 맘껏 누려도 되는 걸까? 언젠가 모든 분야에서 날 능가하는 악몽 같은 사람을 만나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온전히 내 모습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소중한 이가 언젠가 날 넘어섰을 때 아쉬움을 삼키고 진심 어린 갈채를 보낼 수 있을까?
2/27
모든 여행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있다. 여행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새로움과 설렘보다 권태와 짜증이 지배한다. 이번 여행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