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 내려앉은 봄을 살짝 담아왔다
도대체 얼마 만에 다시 찾은 것인지 모르겠다.
창경궁을 다녀온 게 언젠가 싶어 블로그에 여행 기록을 들추어 보았다.
2010년에 다녀왔으니까 벌써 15~6년이 지났다.
긴 시간의 공백만큼 그때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운 듯이 하얗게 잊혔다.
그런데 대여섯 살 때, 돌아가신 부모님과 가족이 함께 갔던 창경궁의 기억은 드문드문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변했지만,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는 창경궁보다 창경원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궁궐의 전각을 일부 철거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왕궁이 아닌 유원지로 변질시켰다.
나중에 일제에 의해 자행된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도,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려서 불렀던 이름이 안타깝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코흘리개 시절에는 사실 창경원을 가보는 게 큰바람이었다.
요즘은 여기저기 동물원이 많지만, 그때는 동물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창경원의 동물원을 보는 게 아이들의 바람이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커다란 이유가 하나 있다.
아주 어렸던 어느 봄날, 돌아가신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창경원의 동물원을 구경하다가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신기하고 재밌게 동물 구경을 하다가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을 보았다.
그 뱀을 보는 순간, 얼마나 놀라고 겁을 먹었던지 울음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그 뒤로 지금까지 크건 작건 간에 뱀은 무조건 싫다.
3월 중순의 날씨는 애매모호하다.
아침, 저녁으로는 겨울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어 옷깃을 여미게 싸늘하지만, 낮에는 성급하게 이젠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포근하다.
화창한 주말 오후, 할 일 없이 집에서 뒹굴다가 갑자기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령으로 써도 될 만큼 무거운 DSLR 카메라는 일찌감치 처분했고, 작고 가벼운 미러리스 카메라로 바꾼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젠 그마저도 귀찮아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까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는 카메라가 잘 있는지 궁금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꺼내어 살피면서 어디를 갈까? 머리를 굴렸다.
이맘때는 계절이 애매하다 보니까 갈 만 곳도 애매하다.
야외로 나가면 좋긴 한데,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있어 썩 마음이 당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실내에 볼만한 곳을 가자니 그러기에는 날씨가 화창하니 너무 좋다.
그렇게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퍼뜩 고궁이 떠올랐다.
고궁은 야외이면서도 궁궐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많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못 찍는 사진이지만 나름 사진 찍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고궁으로 마음을 정하기는 했는데, 이젠 또 어느 궁으로 갈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
사람 많은 곳을 피하면서 고궁의 멋과 운치를 즐기기에는 창경궁이 좋을 듯싶었다.
또 창경궁을 가본 지도 오래되어서 궁금하기도 했다.
오후 날씨는 봄날이 무색하게 화창하고 포근했다.
주말이라 창경궁에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긴 했지만, 고궁의 운치와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창경궁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환했고, 옷차림도 한결 가벼웠다.
홍화문을 지나 옥천교를 건너면 창경궁의 중심 전각인 명정전(明政殿)과 마주한다.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가 의식과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전(正殿)이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다운 규모와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우리 고유의 멋스러움이 있어 오랫동안 바라보게 된다.
이번에 알았는데,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세월의 무게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묵직하게 전해져왔다.
창경궁만이 아니고, 다른 궁궐의 정전을 볼 때마다 드는 의구심이 하나 있다.
정전은 궁궐의 중심 건물이라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그런데 건물 규모에 비해 임금이 앉는 용상과 정전 출입문까지의 거리가 뜻밖에 짧다.
용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는 이해될 만큼 길이가 있는 데 비해 앞뒤 거리는 짧다.
왜 그런 걸까?
궁궐의 정전을 이상하게 지었을 리는 만무한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사극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사극 장면을 보면 용상 앞으로 대신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대신들이 그렇게 늘어서 있을 정도면 그 길이가 제법 될 텐데 실제로 보면 짧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대략 알긴 하지만, 이런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도 구경하는 또 다른 재미이다.
정전에서 품계석이 줄지어 서 있는 조정(朝廷)을 내려다보면 상상의 날개가 저절로 펼쳐진다.
품계에 따라 서있는 수많은 대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진다.
명정전을 나와 다른 전각들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저마다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전각들은 각자가 품은 역사의 이야기는 다르지만, 모습은 다들 비슷하다.
이럴 땐 전각만 떼어놓고 볼 게 아니라, 사진을 찍듯이 전각과 주변의 나무들을 하나로 엮어서 보면 훨씬 더 멋진 경치를 스스로 만들어서 볼 수 있다.
여러 전각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건 현판이었다.
전각 중앙에 달린 현판들은 건물 크기에 비해 크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전각의 당호(堂號)가 새겨진 현판의 글씨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현판을 가득 채운 글씨는 크기도 클뿐더러 획이 굵고 힘이 넘쳤다.
그러면서도 유연하고 부드럽게 보여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국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사진 찍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우리나라 젊은 친구들도 있지만, 많은 건 외국 관광객들이다.
한복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잘 어울려 흐뭇하다.
화사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고풍스러운 전각과 잘 어울리고 또 고궁에 신선한 멋을 보태놓는다.
봄날같이 화창한 날씨여서 그런지 춘당지에 사람들이 많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춘당지는 졸음에 겨운 듯이 잔잔하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예쁜 모습이 춘당지에 반영되어 춘당지는 한 폭의 멋진 그림으로 바뀐다.
춘당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돌계단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엉덩이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서늘함이 전해지지만, 온몸을 휘감는 따스함이 있어 오히려 그 느낌이 더 좋다.
춘당지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머릿속의 잡생각들이 저절로 사라진다.
잔잔한 춘당지의 수면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럴 땐 혼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 누가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데, 혼자이다 보니까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어 좋다.
한낮의 봄기운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겨우내 움츠렸던 몸 안의 세포들을 녹여주었다.
근래 들어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와 편안함을 제대로 즐겼다.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은 것처럼 봄기운이 몸 안에 가득 찼을 때, 느릿느릿 대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색 철골구조로 된 대온실은 밝은 햇살을 받아 더욱더 희고 깨끗하게 보였다.
1909년에 만들어졌으니까, 규모나 수종의 다양성에 있어서는 요즘의 식물원과는 비교할 수 없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그렇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요즘 우리가 새로 지은 거대한 식물원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다들 놀랐을 것이다.
아담한 규모여서 오히려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창경궁에는 사진 찍는 분들이 꽤 보였다.
그분들이 대온실을 그냥 지나칠 리 없고, 역시나 대온실에는 사진 찍기에 푹 빠진 분들이 보였다.
그분들은 모르긴 몰라도 서둘러 봄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봄이 알게 모르게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창경궁에 내려앉은 봄을 살짝 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