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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Apr 10. 2024

즐거운 착각 속에서 살련다

학교 다닐 때부터 또래들보다 조금 어리게 보이는 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동안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그 때문에 젊어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노숙하게 보일까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장유유서가 희미해졌지만, 7~80년대에는 한두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는 깍듯하게 대했다. 그런 시절이다 보니까 한두 살이라도 나이가 어리면 내려보는 경우가 있어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 보이려고 했다.


나라에서 법으로 정해놓은 노인의 기준이 있다. 어쩌다 보니 그 기준을 넘어 이젠 꼼짝없이 노인이 되었다. 누가 노인이라고 불러도 눈알을 부라릴 수 없고, 노인이 아니라고 혼자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노인이라는 말은 끔찍하게 싫고, 노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모이면 은근슬쩍 친구들과 내 모습을 비교해 본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역시 내가 제일 젊게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대놓고 하면 하루 반나절 동안 바가지로 욕먹을 게 뻔해 말하진 않지만, 속으로 그 우월함을 은근히 즐겼다. 


이런 착각을 사정없이 깨뜨리는 게 사진이다. 집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래도 아직은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사진만 찍으면 똑같은 얼굴이 왜 그렇게 늙게 나오는지 모른다. 어떤 때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는 건 물론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는 사진을 찍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올겨울이었다. 강서구에 있는 서울식물원이 보고 싶어 집을 나섰다. 서울식물원에 도착해 당연하게 입장권을 사려고 발권 키오스크로 갔다. 잠깐 키오스크를 살피고 있는데, 안내하는 여자 직원이 다가와서 대뜸 하는 말이 어르신은 밖에 있는 매표소에서 무료입장권을 받으시면 된다고 했다.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니까 솔직히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 사람은 내가 무료입장할 수 있는 나이인지 어떻게 알았지? 내가 노인으로 보이냐고 따질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어 쭈뼛대다가 매표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그냥 한번 넘겨짚은 게 우연히 맞은 거겠지?’ 이때만 해도 눈썰미 좋은 안내직원이 운 좋게 맞힌 걸로 생각했다. 


서울식물원을 구경하고 나서 시간이 남아 가까이에 있는 허준박물관에 갔다. 박물관 입구에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직원이 입장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서울식물원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입장권을 사려고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그때 안내하던 남자 직원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선생님은 무료입장하시면 되니까 잠깐 기다리십시오!” 하면서 친절하게 무료입장권을 뽑아주었다.


아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서울식물원의 여자 직원은 그렇다 쳐도, 50대의 박물관 직원 눈에도 내가 노인으로 보였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늙어 보이나?’ 구경하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의 지독한 착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단 한 번도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퇴근할 때, 지하철 경로석에 앉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노인일지 몰라도, 몸과 마음은 노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퇴근 길이 멀어 어쩔 수 없이 경로석에 앉을 때는 나이도 되지 않은 사람이 경로석에 앉았다고 눈총을 받을까 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법적으로 노인이 되던 날, 행정복지센터에서 어르신 교통카드를 받았다. 그 카드를 핸드폰 투명 케이스 안쪽에 넣고 다닌다.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이 생긴 지 오래되었는데 좀처럼 낫지 않아 고질병이 되었다. 그 때문에 오래 서 있으면 발바닥이 아파 그때는 비어 있는 경로석에 앉는다. 그때마다 어르신교통카드가 든 핸드폰 뒷면을 슬쩍 보이게 잡는다. 그건 누군가가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나름의 방어 수단이었다. 이걸 보면 그간 얼마나 지독하게 착각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 화장실에서 아주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았다.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직은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에도 등급이 있다면 아마 최상등급이지 싶다. 그렇지만 내게도 할 말은 있다. 내게도 노인에 대한 기준이 있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머릿속에 자리 잡은 노인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도 착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를 먹었는데도 내 생각은 젊은 날의 노인 모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손으로 목 부분을 만졌다. 아무 생각 없이 손바닥으로 목 부위를 쓸어 당겼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번 접힌 목주름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세로로 쭈글쭈글 접힌 목주름이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깜짝 놀라 몇 번을 반복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목 피부에서 탄력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걸 보면 나만 몰랐지, 세상은 이미 노인이란 걸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도 한사코 노인이기를 거부했으니… 그런데 나만 이런 걸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착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인터넷으로 난생처음 목 크림을 주문했다. 이 나이에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쭈글쭈글해지는 목에 탄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법이 바뀌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이다. 요즘 그 법을 바꾸어 노인의 기준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노인이냐 아니냐는 법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다. 노인은 겉모습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결정된다. 착각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으니까 그냥 지금처럼 즐거운 착각에 빠져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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