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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Jul 04. 2023

나를 더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

엄마는 뿌리를 옮겨 심은 나무야 - 두 번째


호주에 와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어떤 일을 하든 간에 퇴근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온전한 나의 시간이 펼쳐졌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퇴근 이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시간은 생각보다 꽤 길었다. 밥을 손수 지어먹고 치우고 두세 시간 동안 취미활동이나 세컨드 잡을 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한국에서는 야근 없는 날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웠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삶이었고, 매일 곳곳에 이런 시간들이 숨어있었다.
일하다가 모닝티를 마시고 금요일 오후에는 무늬만 하프데이하는 척하는게 아니라 그냥 전직원이 두시면 다 퇴근하고 없는 문화, 말그대로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이 삶은 얼마나 바쁜 하루를 보냈든 간에 그 피로와 스트레스를 날리기에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저녁을 지나 밤을 보내고 나면 어제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만큼 리셋되기에 충분한 시간.

한국인 관점에서는 뭐든지 느리고 여유로운 이곳 호주 사회에는 부지런히 쓰면 꽤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 많이 널려있었던 것이다. 아까울만큼 널린 시간들을 모아서 뭔가를 해야지, 하면서 그 시간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생산적으로 보내기위해 발버둥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한국인으로서 이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는데 포커스를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그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남편과 함께 요리를 하고 넷플릭스를 보고 대화하며 늘어지게 쉬는 것도, 아가와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놀고 이유식을 만들고 친구들과 피크닉을 가기도 하면서.

내게 주어진 이 많은 여유 시간들을 어떻게 쓸지를 매일매일 궁리한다.

한국에서 살아오던 삶의 패턴을 바꾸고 이 곳에서의 바뀐 삶의 패턴을 좋아하게 될 수록 이곳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하면 더 풍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한다. 더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하며 이 시간을 풍성하게 채울수 있도록.
그러지 않으면 세상 지루하고 심심하고 외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애정하는 것들로 일상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시드니 로컬 마켓들 도장 깨기


호주에 처음 와서는 할 게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지고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거의 모든 비즈니스들이 문을 닫았으니까. 할 게 없긴 없었다. 일단 한국에서 휴일을 보내는 방식과 이곳에서 휴일을 보내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쉽게 정보를 찾고 어떤 전시든 공연이든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에 비해서 이곳에서는 양질의 문화적 자극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호주에 온 지 첫해, 이곳에서의 삶은 무채색인 것 같다고 느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이곳에서 내게 정말 중요했던 문화적 자극과 그를 통한 영감 얻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끝나면서 비즈니스들이 조금씩 다시 문을 열고 국내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채로운 전시 문화, 곳곳에 활성화되어 있는 로컬 마켓, 다시 문을 연 스몰 비즈니스들이 보였다. 관심 있는 전시들을 기획하는 뮤지엄의 뉴스레터를 구독해 두거나 아트갤러리의 멤버십에 가입하면 1년에 70불 정도의 가격으로 거의 모든 전시를 볼 수 있다. 두 달에 한번 정도 꼭 감성을 촉촉하게 전하는 날을 가지려고 한다.

토요일 오전에는 Potts Point, Bondi, Fleminton, Merricville 같은 곳에서 로컬 마켓들이 열리는데 각 지역별로 고객들도 다르고 입점한 비즈니스들의 포트폴리오도 다르다. 이런 마켓에 가면 다양한 이민자들이 만드는 음식들도, 실제로 성공한 비즈니스들이 셋업 한 부스들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내 동생의 브랜드 묘미(@Studio_myomi)가 생각나는 각종 공예품과 일러스트들을 파는 아티스트들의 부스도 있고 세컨핸드 옷가지들과 소품을 파는 부스들도 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런 마켓에서 파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그 마켓의 분위기를 살피고 브런치를 먹고 저렴한 가격에 (저렴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필요했던 물품이나 옷가지를 세컨핸드로 구매하면 아주 지속가능한 소비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게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로컬 마켓 도장 깨기는 내 정신건강에도 너무나 좋은 취미다. 육아를 하느라 일하는 자아와 멀어진 것 같아도 요렇게 로컬 마켓에 가서 마켓의 흐름을 보고 사람들이 어느 부스에 드나들고 어디가 붐비는지를 직관적으로 보고 오면 일하는 자아가 꿈틀대며 다시 나오기도 한다. 몇 달 전부터 시작한 CALD (Culturally and Linguistically Diverse Community) - 문화적 언어적으로 주류가 아닌 사람들, 주로 다른 문화권에서 이민 오거나 난민으로 온 사람들 - 집단의 사업가들을 위한 마케팅 컨설턴트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서도 자주 시장에 나와서 보고 감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고른 재료로 정성 들여 요리하기


매주 일요일, 다음 주에 무엇을 해먹을지 대강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서 장을 본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 쉽게 배달시킬 수 있었던 서울에서 자취생활과는 달리 이곳에서의 자취 생활에서는 요리가 필수였다. 배달시킬 수 있는 음식의 종류도 너무나 한정적이고 무엇보다 배달팁이 너무나 비쌌다. 그리고 퀄리티도 한국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기는 전혀 끌리는 옵션이 아니었기에 해 먹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 또한 저녁이 있는 삶이기에 가능했던 것, 서울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요리하기 위해 장을 보고 부엌에 서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똥손이구나... 하고 살았던 게 삼십 년 가까이 된다. 서른이 되도록 라면 끓여본 거 이외에 제대로 요리해 본 적 없던 내가 호주로 넘어오면서 요리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하기시작했고, 어떤 때는 공부하고 투잡 & 쓰리잡 하면서 에너지가 없어서 대충 남은 재료로 휘뚜루마뚜루 만들어서 도시락을 싸기도 했었다. 지금의 남편이 너무나 손쉽게 만드는 연어베이글 토스트나 치킨 아보카도 샌드위치 같은 것들로 도시락도 많이 싸줬었는데. 그 함께 있으면서 ssg.com 같은 데서 클릭해서 시키는 재료와 직접 눈으로 보고 따져가며 고르는 재료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내 돈 주고 30만 원이 넘는 칼도 사보았다. 직접 뭔가를 요리해서 퀄리티가 좋을 거라는 기대를 안 하고 살았던 '똥손'인 내가 이렇게 해 먹는 집밥에 진심이 된 것은 그의 공이 팔 할은 될 것이다.


지금은 일요일 오후,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아가와 함께 꼼꼼히 장을 보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호주의 3대 슈퍼마켓 체인들 - Aldi, Woolworth, Coles- 을 번갈아가며 들러서 장을 본다. 각각의 마트에서 파는 물건들의 종류와 가격, 무엇을 어디에서 사면 좋을지를 대강 알기 때문이다. 신선한 재료들을 꼼꼼하게 따져서 사고, 가끔 더 고급진 재료를 살 때는 더 좋은 재료들이 파는 샵도 간다. 근방의 한국 식품점, 중국 식품점을 다니며 필요한 재료와 향신료들을 구비해두기도 해서 해외살이에 아시안 식품점이 근처에 있는 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중에는 거의 외식을 하지 않고 주말에는 외식을 하는데, 주중에 해 먹는 메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늘어간다. 그렇지만 역시 요리는 간편하고 쉽게 하는 게 최고다. 재료는 정성 들여 고르더라도 요리 자체는 별 신경 안 쓰고 할 수 있는 것들로, 힘을 빼고 해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을 더 개발해야만 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을 디저트를 직접 굽기


우리 부부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오면서부터는 내가 혼자 있는 시간과 잉여롭게 쉬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저녁이 있는 삶'까지는 좋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그리고 뭘 하려고 해도 몸 컨디션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집 밖에도 못 나가고 누워서 쉬어야만 했다.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안 좋아서 쉬는 날이면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서 머리가 팽팽 돌았다.  


집에 나가긴 힘들고 그렇다고 집에서 가만히 있는 건 못 참겠던 어느 날, 베이킹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간단한 베이킹으로 집에서도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단번에 내 취미가 되었다. 처음에는 못 만들던 제누와즈 (케이크용 빵)도 열 번 정도 실패하자 눈 감고도 만드는 수준이 되었다. 못하던 걸 오븐 온도를 조절하거나 시간을 늘리고, 계란 휘핑을 더 단단하게 하거나 버터를 녹인 온도를 맞추는 등의 사소한 디테일을 잡는 것으로 개선하는 재미는 컸다. 꼭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유튜버들을 섭렵하며 나만의 레시피를 찾을 수 있는 점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임신 중에 시작한 베이킹은 아가를 출산하고 나서도 계속 가져가는 취미가 되어서 지금도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디저트를 굽고,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선물하게 되었다. 누굴 만날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디저트를 구워서 선물하거나 같이 먹으면 그 시간이 조금 더 퀄리티 있어지고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가족 모임에서 누군가 생일을 맞이하면 케이크는 무조건 내가 전담하게 되기도 했다. 누군가의 생일이 다가오면 이번엔 무슨 케이크를 만들까, 하고 찾아보고 며칠 전에 미리 만들어본다. 그리고 개선할 점을 찾아 당일에 만들어가면 다들 먹으면서 이번 케이크에 대한 심사평을 해주는데,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또 우리 가족의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것 같아서 기쁘기도 하다.


내게 이런 취미를 선물해 준 우리 아가에게 나는 자주 말한다.

'우리 아가가 엄마를 지켜주는 것 같아'

그것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가와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기


아가는 엄마를 더 조심하게 만들고, 때때로는 매우 용감하게 만들어준다.

다른 사람을 더욱 이해하고 헤아리고 배려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새로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망설임이 없게 해 줬고, 건강한 식재료와 요리법을 찾아보게 만들어줬다.


아무리 졸려도 아가 잠자리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체크하고, 그냥 졸려서 넘어갈법한 것들도 아가를 생각하면 달려가게 하는 힘.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호주 공립병원에서 출산하기 위해 남편 없이 매번 병원을 왕복하고 온갖 의학용어들이 왔다 갔다 하는 의사와 만나고 출산을 해낸 것. 말도 안 통하는 아가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지를 헤아려보는 연습으로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법을 배운 것. 아가를 위해서라면 모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엄마들끼리는 누구와도 격 없이 이야기 나누고 서로를 존경하게 된 점. 그리고 모유수유를 하고 이유식을 만들면서 누구보다 건강에 신경 쓰고 영양 챙겨 먹기에 진심이 된 점.. 이 모든 것이 아가가 준 선물이다.

우리의 아가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넘쳐흐르는 사랑이 허락해 준 선물이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찾는 우리 아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이자 잠시 내 삶에 찾아온 손님이랬다. 새까만 눈동자로 가득 찬 눈과 통통한 볼, 매미처럼 착 달라붙는 몸과 무엇이든 꽉 쥐는 고사리 같은 손, 여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매일매일 눈에 담고 이 촉감을 간직하기가 바쁘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은 누워서 배웅하면서도 아가가 저 멀리 아가방에서 깨서 조금만 기척을 내도 새벽녘의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달려가게 되었다. 새벽 여섯 시면 시작되는 우리의 하루, 그러나 너무 바쁘고 소중한 그 하루가 매일 빠르게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 잔잔한 음악을 틀고 집을 청소하며 환기를 시킨 뒤 좋아하는 원두의 커피를 내린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플랫화이트, 아이스 라테, 롱블랙 등 마시고 싶은 걸 내려두고 아가를 돌보며 틈틈이 마신다. 매주 토요일에만 나오는 Australian Financial Review의 Weekend 버전을 한주 내내 이 아침시간을 활용해서 읽는다. 경제를 알아야 그 사회가 보이고 그 사회의 관점에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이민자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살아갈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시각과 이곳의 이민자로서의 시각을 고루고루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경제지를 읽는다. 영어 공부도 되고 어디서 이야기할 일이 생겼을 때에도 시사와 경제, 외교를 알고 있으면 자신감 있게 대화할 수 있어서 좋다.


아무튼, 신나게 육아를 하다가 거울을 보면 분명 이전과는 다른 내가 서있는데, 그 옆에 아가를 원플러스원처럼 끼고 서있어서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경험을 한다. 더 이상 FOMO (Fear of Missing Out)에 시달리거나 외모 집착에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았다. 내가 조금 푸석푸석해지더라도 그만큼 아가가 반짝반짝 생기 있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졌다. 요즘 뭐가 핫한지, 어떤 콘텐츠가 재밌는지 모르더라도 새로 열게 된 부모의 세계가 너무나 견고하고 따듯해서 행복했다. 아무리 새로운 곳에 가서 처음 해보는 걸 하더라도 아가가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원래는 엄마가 아가를 지켜주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가와 엄마의 이 특별한 연결을 경험하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엄마가 아기에게 내리사랑을 주는 건 줄만 알았는데... 살면서 크고 작은 행복이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하고 큰 행복은 아가가 선물해 줬다.

내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내 커리어와 사회적 자아가 중요해도, 그 무엇도 아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주는 애틋함과 사랑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 지금 허락된 이 시간을 너무나도 소중하고 애틋하게 즐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정하는 것들로 내 일상을 채우며

나를 더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 편에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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